졸업이 와버렸다. 밴드 멤버들은 내가 정식멤버가 되길 원했다. 나는 회사에서 방치된 상태였기 때문에 멤버들이 나의 사장을 만나 얘기를 하면 자연스럽게 놓아주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나는 계륵이었다. 처박아 두고 잊어버린 장난감을 누군가 가지려 하자 다시 흥미가 생겼던 걸까. 그녀는 나를 양보하지 않았다. 몇 년 간을 꿈쩍 않더니 갑자기 ‘나랑 앨범 안 낼 거냐’ 며 눈에서 레이저를 쐈다. 이제 진짜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바보 같은 희망을 가진 채 나는 터덜터덜 밴드를 떠났다.
그렇게 다시금 눌러앉은 회사는 몇 달 후 그녀의 매우 사적이(라기엔 뉴스에 출현할 만한 범법) 스캔들로 공중분해 되고 말았다. 전속계약은 효력을 잃었다. 애초에 그녀가 그만두고 싶으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방식의 아무런 힘도 없는 계약이었다. 헛웃음이 났다. 학교도, 밴드도, 회사도 아무런 울타리도 없이 나는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그 어떤 이유도 없이 이 세상에 피투 된 존재가 되었다. 나의 조상들이 말하기를 그것은 바로 낙동강 오리알이었다. 스물일곱 살 먹은 오리알. 알을 깨고 나가기에 너무 늦은 나이 같았다.
예대 재학기간 중 오디션 제안만큼 많이 들어온 것이 입시레슨 제안이었다. 나는 늦게 입학한 덕분에 동기들 중 가장 빨리 레슨을 시작했고, 당시에는 그것이 꽤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짧은 시간 동안 나의 재능을 조금만 써도 꽤 큰돈을 벌 수 있었고, 자유로운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때는 그 시간당 페이가 10년 넘게 동결될 줄 몰랐지.
돈 버는 재미에 빠졌고, 돈 쓰는 재미에도 빠졌다. 스므살이 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찌감치 독립을 한 터였지만, 늘 반지하를 전전하고 있었다. 나는 졸업과 동시에 반지하를 벗어나 바퀴도 곱등이도 없는 신축 오피스텔로 이사를 했다. 폴라로이드 사진과 예쁜 소품들로 나의 기깔나는 원룸을 꾸미고 최신형 DSLR과 필름카메라를 사서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에펠탑도 빅벤도 좋았지만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반해 한국에 돌아와서는 숙소에서 먹은 조식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드립 커피를 내리고 구운 토스트에 프레지덩 버터를 발라 먹었다. 유려한 하이브리드 미니벨로를 사서 근처 호수공원을 달렸다. 열심히 레슨을 하면 이 모든 걸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터울 많은 동생이 군대에 가게 되자 왠지 어머니를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본가로 돌아가면 월세와 생활비도 세이브될 테니 이 참에 레슨을 줄이고 음악작업에 집중하기에 나쁘지 않은 기회라고 생각되기도 했다. 그렇게 7년 만에 본가로 돌아갔다.
졸업 직후, 한동안 회피했지만 나는 계속 음악을 해야만 했다. 아직 어떤 꿈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소속사도 팀도 학교라는 울타리조차도 없다. 나는 스스로 소속을 만들기로 했다. 래퍼 1명, 비트메이커 1명, 보컬 겸 프로듀서 1명으로 구성된 힙합팀을 만들기로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찾은 사람들은 예술대학 동기가 아닌 첫 대학교 힙합동아리 동기였다. 가장 순수했던 시절, 무대 위에서 최고의 행복을 공유했던 친구들.
당시는 MP3의 시대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CD플레이어를 들고 다니던 사람들은 이제 손가락 두 개만 한 '아이팟 나노'를 들고 다니며 음악을 들었다. 해외에서는 '아이튠즈'가 국내에서는 '멜론'이 디지털 음원시장을 선점하여 빠르게 성장했다. 사람들은 이제 CD를 구입하는 대신, 음원을 구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음원깡패'가 되기로 했다. 당시 아이튠즈 차트를 점령했던 힙합밴드 ‘블랙 아이드 피스’를 롤모델 삼고 의기투합 했다. 데모를 만들고, 우리의 음악색깔을 어필할 수 있는 기획사들에 우편으로 데모 CD를 부쳤다. 적극적으로 무대를 찾아다녔고 좋은 무대를 위해 연습했다. 어쩌다 하게 되는 축가조차 최고의 퀄리티로 했다. 24시간 방음연습실을 구해 n분의 1로 월세를 내고 세 명이 8시간씩 나누어 썼다. 나는 새벽타임을 쓰게 되어 밤낮이 바뀌었지만 자정의 빈 도로를 달리는 자전거 위에서 자유를 느꼈다.
팀 이름은 ’ 소울 씨프 Soul Thief’였다. ‘당신의 영혼을 훔쳐가겠다’는 포부에 걸맞게 우리의 음악은 희망적, 감성적이었고 꿈에 관한 것들이 많았다. 꿈을 독려하고 성장을 이야기하고, 우정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 셋다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취업이 아닌 알바로 먹고살며 작업과 연습과 공연을 했다. 우리는 날이 갈수록 가난해졌고 무모했지만 꿈을 놓지 않고 진지하게 임했다. 음악의 퀄리티도 높았고 대중성도 있었다. 우리를 알아봐 주는 회사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고 기회를 잡기 위해 노력했다. 데모 CD를 들고 타이거JK를 만나러 의정부 작업실 앞에서 죽 치고, 다듀를 만나러 홍대 어드메를 어슬렁거렸다. 힘들었지만 낭만이 있었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함께 달리고 있다는 것에서 전우애를 느꼈고 종종 행복했다.
팀 결성 3년 차,
영혼도둑은 기획사 대표들의 영혼을 훔쳐오지 못했다.
성과 없는 현실은 팀을 찢어 놓았다.
우리의 메인 래퍼는 취업을 하면서 팀은 해체 됐다.
내가 서른 살이 된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