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단발로 자르고 작은 어쿠스틱 기타를 샀다.
코린 베일리 래와 홀리브룩을 부르기 시작했다
30대의 시작은 '상실' 그 자체였다.
팀은 해체됐고, 10년 연애는 끝이 났으며, 윈도우와도 이별했다. 두려웠지만, 우려와 다르게 일주일 만에 맥 OS에 적응했다. 3년간 함께 했던 팀은 해체됐지만, 나는 그제야 가장 하고 싶은 음악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한참 유행 중이던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는 '아델, 비욘세, 리아나, 레이디 가가'의 노래가 유행이었다. 5년 차로 접어드는 입시레슨 또한 합격을 위해 강력한 보컬스킬을 보여줄 수 있는 곡을 가르쳐야기에 나는 늘 자극적이고 화려한 노래들을 부르고 있었지만, 실은 '코린 베일리 래'와 '파이스트'를 좋아했다.
당시 전 세계는 어쿠스틱으로의 회기를 원하는 분위기가 자리 잡았다. 신디사이저의 발달로 2000년대 내내 남용된 전자적 사운드는 귀를 피곤하게 했고, 진짜 악기의 소리와 여백이 있는 사운드를 원하고 있었다. 영화 '원스Once' (2007)의 OST가 인기를 끌었고 아카데미 주제가상까지 수상했다. 코린 베일리 래의 'Like a Star' 파이스트의 '1,2,3,4' 에드시런의 'The A Team' 등 어쿠스틱 기타 한대로 노래하는 가수들이 차트에 올랐고, 다이앤 버치, 멜리사 폴리나 같은 뮤지션이 사랑받았다. 인디팝, 소울팝, 포크, 인디록이 부흥하면서 한국에서도 버스커 버스커, 장재인 등이 등장했다.
이 흐름에 동조하듯 나의 무의식 속에 숨어있던 '카펜터즈'와 '비틀즈'도 꿈틀대기 시작했다. 기타 한대, 피아노 한대로 부르는 담백한 노래들, 귀를 지치게 하는 강한 톤과 난무하는 고음의 보컬전쟁 속에서 내 고막에 평화를 가져온 '말하듯 하는 노래'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영혼도둑 시절부터 코린 베일리 래를 들으며 책을 읽고, 파이스트를 들으며 산책하고, 자전거를 타며 리사오노를 듣고. 커피를 내리며 요조를 듣던 차였다. 이제 마음이 가는 대로 따라가 보자.
나는 머리를 자르고 기타를 샀다.
소울시프를 하는 동안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팀은 해체됐고 나는 다시 세상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동안 연락이 끊겼던 친구들을 만나고 페이스북을 시작했다. 내가 찍은 사진들을 블로그에 올리고 짧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걸 계기로 한 프로젝트의 포토그래퍼로 참여하게 됐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이상한 남자를 만났다.
이것은 내 인생 최고의 구원서사다.
포토그래퍼 5명 에디터 3명으로 이루어진 프로젝트였다. 그중 3명이 커머셜 스튜디오에 속한 프로사진가였다. 나를 포함한 아마추어 2명은 그들에게 피드백을 받고 촬영 노하우를 배우며 일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그는 시크한 사람이었다. 대부분 자신의 후드동굴 속에 무심하게 숨어 지냈지만, 불현듯 나타나 건방진 말을 내뱉으며 지나갔다. 다정하지 않았고 서글서글 같은 거랑 몇억 광년정도 떨어져 있는 존재였지만 촬영할 때는 프로페셔널했다. 그래서인지 시종일관 건방진 그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에디터들은 그를 '시크하고 일 잘하는 포토'라고 칭찬했다.
아무도 나를 알지 못했다.
나의 페르소나는 지나치게 견고했다.
나는 나를 잘 숨겼고 모두 속아 넘어갔다.
모두들 나를 강하고 리더십 있는 알파걸로 여겼다. 나조차도 내가 만든 나에 속아 그렇게 여겼다. 하지만 종종 버거웠다.
그것은 대부분 아버지의 정체성이었지만 나는 의심 없이 살았다. 성취하고 몰입하는 강한 자의 정체성, 그것으로 음악을 해왔고 성취를 이루었기에 안되면 되게 했고, 모자라면 더 했다. 내 안에 있는 다른 면은 억누르고 숨겼다. 부드럽고 나약하며 느긋하고 탐미적인 자아. 성공에 전혀 도움 되지 않는 무능력함 들이라고 여겼다.
나의 페르소나는 얼굴에 깊게 박혀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나를 숙주로 점점 더 크게 자라나고 있었다. 이제 가면 아래 뭐가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나조차 나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사진 찍는 이상한 남자를 만난 이후
견고했던 가면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나를 꿰뚫어 봤고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 둔 나의 조각들을 건져 올렸다. 꽁꽁 숨긴 나약함과 불안, 완벽해 보였던 위장까지, 나는 모든 것을 들켰다. 그 앞에만 서면 ‘아, 네네, 제가 마피아입니다만…’ 하고 순순히 자백했다. 경계하지 않는 고양이처럼 발톱은 사라졌다. 왜 그렇게 되어버렸는지는 알 수가 없다. 순식간이었다. 나는 어느 날부터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가 나를 알아차려 주기를 기다렸다.
놀랍게도 무장해제된 나 자신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