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진 나는 '커피소년'과 '정준일'을 듣기 시작했다.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노래들이 모두 내 노래처럼 들리는 마법이 내 인생에도 일어난 것이다. 라디오덕후였던 내게 '커피소년'은 '조규찬'과 '더클래식'의 향수를 불러일으켰고 솔직 담백한 가사와 왠지 약간 촌스러운 보컬이 첫사랑에 빠진 것처럼 나를 설레게 했다. '정준일'의 요동치는 감정도 당시의 내게 안성맞춤이었다. '유재하'와 '김광석'의 감성이 느껴졌고 그 파도에 마음을 맡겼다. 오르락내리락 멀미가 날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내 안에서 곡이 쏟아져 나왔다. 그동안 쓴 곡들이 머리에서 나왔다면 이제 가슴에서 흘러나왔다. 무장해제된 들뜬 마음이 쓴 곡들은 너무나 솔직하고 유치해서 낯부끄러웠다. 완성도는 저세상이었지만 그때 나는 처음으로 숨겨두었던 나를 만났다.
밤이 지나 아침이 오듯 그는 나의 연인이 되었다.
나의 시크한 연인은 놀랍도록 다정했다.
마음을 준 사람에게는 모든 걸 퍼주는 반전매력의 남자였다. 그와 함께 '시규어로스'의 내한을 보러 가고, '라이언 맥긴리'의 전시를 보러 갔다. 그의 집에는 '라디오 헤드'의 CD와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집이 있었다.
내가 미뤄두었던 욕망들이 그의 안에 가득했다. 그의 책장 속에, 그의 블랙 아이팟 속에, 그리고 그의 사진 속에. 우리는 떨어져 나간 조각의 경계처럼 딱 맞았다. 구름의 모양 속에서, 그림자의 모양 속에서 우리는 종종 같은 것을 발견하고 놀라곤 했다. 연결된 느낌이었다.
그와 만나고 나는 드디어 여장부 자작극에서 벗어났다. 유교보이와 유교걸의 올드스쿨 연애가 시작됐다. 이미 잔주름이 생기기 시작한 30대 초반이었지만 마치 소녀와 소년이 만난 것처럼 순수한 연애를 했다. 재고 따지지 않았고 그 흔한 밀당도 없었다.
내가 맡은 역할은 인생 캐릭터였다. 한 번도 드러내지 못했던 나였다. 수줍은 내가 좋았다. 그의 앞에서 당당하게 약할 수 있는 나 자신을 천천히 받아들이며 이상한 쾌감을 느꼈다.
그렇게 나의 가면은 빠르게 녹아내렸다. 상대에게 의지하는 법을 몰랐던 나는 이제 의존성 성격장애를 의심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약하면 지는 거야.
여성스러움은 위험해.
싸워서 이겨야 해.
함부로 믿지 말고,
안전을 확보해
모든 가치관이 흔들렸다. 이제 내게 더 이상 강함은 미덕이 아니었다. 나는 모처럼 전투모드를 껐다. 가드를 내리고 나약한 나 자신을 그대로 던졌다.
해방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