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시켜 줄 조짐은 1도 없는 회사 하나 믿고 나이만 먹을 순 없었다. 국문학으로 성적장학금까지 받아놓고 보니 이왕 할 거 음악을 공부하는 게 미래대비가 될 것 같았다. 당시 서울예대의 실용음악과 보컬 경쟁률은 400대 1을 넘었다. 그 좁은 문을 입시준비 없이 한방에 뚫었다. 수년간의 무대경험이 입시준비 그 자체가 되었던 건지, 행운의 여신이 각 잡고 윙크라도 날려 준건지 나는 하루아침에 예대생이 되었다.
실용음악에 시옷도 모르던 내게 갑자기 '밴드'의 길이 열렸다. 첫 합주곡이 아직도 또렷이 기억난다. 영국의 애시드 재즈 밴드 '브랜뉴헤비즈'의 'Brother, Sister'라는 곡으로 애시드 재즈 특유의 펑키한 리듬과 알앤비소울 요소가 결합된 그루비한 곡이었다. 평생 반주 MR에만 노래를 하던 내게 합주는 감동 그 자체였다.
드럼은 내 바로 뒤에서 심장을 쿵쿵 때리고, 동료들과 사운드를 함께 만들어 가고 있다는 실시간의 감각은 놀라웠다. 너무나 사랑했던 음악들을 리얼 사운드로 부를 수 있다는 것도 행복했다. '에리카 바두, 질 스캇'의 음악을 라이브 버전으로 부르면 MTV 언플러그드가 따로 없었다.
1학년 첫 발표회인 장독대에서는 나의 자작곡을 화려한 밴드구성으로 연출했다. 드럼, 베이스, 키보드, 기타에 리얼브라스 3명, 래퍼 2명, 코러스 7명에 dj까지 투입, 최다인원을 동원한 무대였다. 트라이톤으로는 역부족이어서 조악했던 기타 사운드가 엄청난 테크닉의 리얼 사운드로 대체되면서 재즈힙합 장르의 신나는 곡이 완성됐다. 그야말로 환골탈태. 보컬동기 7명의 소울풀하고 강력한 콰이어까지 쌈뽕하게 질러주니 진짜 장독대 갑분 그래민 줄. 갈색 레게머리를 땋고 올라가서 댄브에 춤까지 췄다. 말 그대로 나 하고 싶은 거 다 한 무대. 그 무대로 캠퍼스를 열광의 도가니탕으로 만듦. 그게 내 음악인생의 리즈였을 줄이야...
하지만 학교생활은 별천지였다. 춤이든 노래든 평생독학만 해 온 나로서는 외계행성 같았기에 늘 긴장 상태였다. 다행히 그 시절엔 젊음과 체력이 받쳐주어 긴장 자체를 즐길 수 있었지만 언제나 '해내야만 하는 상황'에 쫓기고 있었다.
학원에서 체계적으로 기초를 다지고 수년간 전문적 피드백을 받아 온 사람들. 그 중에서도 높은 경쟁률을 뚫은 최고 실력자들이 모여있었다. 나와는 ‘종’이 다른 느낌. 그들 사이에서 몰래 두려움과 압박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대로 손 놓고 뒤처질 수도 없었다. 그들이 몇 년간 꾸준히 해 온 것을 나는 속성으로 해내야 했다. 일단 살아남자.
남들은 입시학원에서 수년간 배운 것을 단기간에 따라가기 위해 한계 이상으로 노력했다. 전공은 보컬이었지만 이론과 연주까지 음악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게 욕심났다. 음악을 전쟁처럼 하기 시작했다.
모든 실기와 발표에 전투적으로 임했다. 그 포상으로 과탑이 되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1학년들은 술과 연애로 캠퍼스의 낭만을 채우며 젊음 탕진잼이 한창인 틈을 타, 변태처럼 연습한 결과였다. 나는 나의 치열함을 들키고 싶지 않았고 점점 마음의 문을 닫았다. 내 안에 싹트고 있던 강한 강박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래도 그 덕에 선후배와 교수님들 사이에서 실력자로 소문이 났고 심심찮게 오디션 제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회사가 있었고, 계약에 묶여있었기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수님의 소개로 졸업한 선배들이 만든 밴드의 게스트 보컬을 하게 되었다. 이미 자리를 잡기 시작한 탄탄한 실력의 인디밴드였고, 정식멤버 모집이 아니었기에 계약은 문제 되지 않았다.
장르는 알앤비나 네오소울은 아니었지만, 그 요소들이 충분히 묻어있는 '애시드 재즈'였다. 이미 즐겨 듣고 있던 '브랜뉴헤비즈, 인코그니토, 자미로콰이' 같은 밴드들 덕에 내게는 익숙한 장르였다. 합주도 공연도 재밌었고 멤버들도 너무 좋았다. 첫 공연은 성공적이었고 나는 좀 더 기동성 있게 일하기 위해 (+ 왠지 모를 낭만) 홍대로 자취방을 옮겼다. 그냥 홍대로 이사했을 뿐인데 이미 프로뮤지션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걸로 데뷔의 목마름을 조금은 해소할 수 있었다. 한줄기 숨구멍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