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곡을 해석한다는 것

악보에 스며든 의미를 찾아서

by 이준봉

얼마 전에 쇼팽 발라드 4번에 관한 연주를 찾아보다가, 눈에 띄는 동영상을 하나 발견하였습니다. 바로 안종도 피아니스트님이 쇼팽 발라드 4번을 해석하면서 설명해주는 영상이었습니다. 곡의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만의 느낌과 관점으로 풀어가는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한 마디를 직접 연주하고, 거기에 대해 간단한 부연 설명을 덧붙이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요. 곡을 해석하는 내내 피아니스트가 이야기하는 이미지들이 그대로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그만큼 구체적이며 감성적으로 설명이 와닿았습니다. 피아노의 대가는 이러한 관점으로 음악을 바라보는구나 하였습니다.


영상을 모두 시청하고 나니까 어렴풋이 과거에 있었던 일도 회상되었습니다. 예전에 피아노 학원에 다녔을 때, 저는 딱 한 번 이런 식으로 곡을 해석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요. 그 피아노 학원은 제가 오랫동안 다닌 학원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집이 가까웠다는 이유만으로 다닌 것이라서, 몇 달 정도만 다녔다가 다른 학원으로 옮겼던 기억이 납니다. 그 학원에서는 가끔 원생들을 한자리에 모이도록 한 다음에, 음악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면서 피아노 선생님이 곡에 관한 설명을 해주시곤 하셨죠. 아마 2~3달에 한 번 정도 그러한 자리가 마련되었던 것 같습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그 프로그램이 초등학교 저학년만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고학년은 원래 연습하던 대로 피아노를 치고 갔습니다. 물론 그때는 좋았습니다. 제가 연습해야 할 시간만 채우면 바로 집에 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오히려 그런 시간이 음악을 익히고 친숙하게 하는 데에 더욱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피아노를 물리적으로 연습하는 시간도 필요하겠지만, 곡을 해석하는 과정을 배운다는 것도 반드시 익혀야 할 소양이기에 그렇습니다.


villa-4464471_1920.jpg


제가 그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동안에 몇 번 음악 감상회가 열렸는데, 아직도 기억나는 곡이 있습니다. 바로 <숲속의 대장간>(Die Schmiede im Walde, Op. 126 by T. Michaelis)이라는 제목의 곡입니다. 저는 직접 곡 설명을 듣거나, 감상회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음악의 멜로디나 해석이 떠오르지는 않습니다. 단지 ‘숲속의 대장간’이라는 곡으로 감상회를 가졌던 순간만이 기억납니다. 피아노 연습이 끝나서 연습실을 나오면서, 선생님이 곡을 설명해주고 원생들이 앉아서 설명을 듣는 그 풍경이 떠오르는데요. 그때 참 평온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집에 빨리 갈 수 있다는 안도감 때문은 아니었겠죠?


모든 곡에 담긴 음악에는 어떠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농이나 체르니 연습곡 같은 경우에는 우리가 그것로부터 음악성이나 의미를 느끼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렵더라도 분명 해석할 여지는 있으리라고 봅니다. 하물며 모차르트나 베토벤, 낭만주의 음악의 표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쇼팽이나 리스트의 곡을 감상할 때에는 어떨까요? 무궁무진하게 음악을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피아노 연습은 단지 기계적으로 혹은 테크닉적으로만 이루어지진 않는다는 뜻이죠. 정확한 악보 읽기 및 물리적 연습과 함께 음악을 해석하는 연주자만의 시각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people-2589168_1920.jpg


안종도 피아니스트님의 유튜브 영상을 시청하면서, 또한 이전에 얼핏 경험한 피아노 학원에서의 음악 감상회를 떠올리면서, 저는 곡을 연주하는 것만큼이나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어쩌면 그게 더 중요할 수도 있겠습니다. 곡을 해석한다는 건 곡에 담긴 음악을 표현하고 즐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군가가 아무리 피아노를 능숙하게 친다고 해도 감정이나 해석 없이 친다면 그의 연주는 오래지 않아 멈추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기교와 테크닉이 미숙하더라도, 심지어 연습이 부족하더라도, 곡에 담긴 음악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고 몰입한다면 그 사람은 끊임없이 연주를 지속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어쩌면 이는 교육의 현장과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작금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지 수능 1등급 성적표 혹은 내신과 생활기록부입니다. 대학생이나 취준생이라고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학벌, 학점, 스펙, 자격증, 대외활동 및 봉사활동 기록… 등 이름과 형식만 바뀔 뿐 반복되는 건 똑같습니다. 이와 같은 단일한 결과적 지표로 인간이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준비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임을 몸소 느낍니다. 일단 남들이 다 하고 있으며, 이러한 구조의 사회가 쉽사리 변화될 것 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언젠가 무대에 올라 곡을 연주할 피아니스트가 기계적으로만 피아노를 연습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library-869061_1920.jpg


하지만 교육을 받는 학생이 자기 주도적으로 앞으로 갖고 싶은 직업을 명확히 인지하며 설계하고자 할 때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때부터 교육은 의무사항이나 강제적 성격으로부터 탈피하게 됩니다. 수동적 학습이 능동적 배움으로 바뀝니다. 자연스럽게 교육의 능률이 오르게 됩니다. 학생의 태도가 변화하면 교육자의 태도도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학생이 적극적으로 배우고자 하는데, 교육자가 나 몰라라 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육의 선순환이 이루어집니다. 저는 이러한 교육 시스템을 사회가 주도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학생들이 우후죽순으로 나올 수 있도록 말입니다.


만약에 제가 피아노를 전공하여 피아노 학원의 선생님 혹은 원장님이 된다면, 음악을 마음껏 해석하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교육을 해보고 싶습니다. 저를 포함한 여러 선생님이 정기적으로 몇몇의 곡을 해석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학생들도 자연스럽게 음악을 즐길 수 있도록 말입니다. 나이 별로, 아니면 곡의 난이도 별로 나누어 진행해도 좋겠습니다. 그럼 좀 더 세분화해서 학생들의 음악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겠지요. 물론 이제는 그러기엔 늦은 듯합니다. 혹여나 이 글을 읽으시는 피아노 학원 선생님이나 관련 업계 종사자분이 있으시다면, 저의 못다한 꿈을 이루어주시길 바랍니다.


leiden-4895601_1920.jpg


허나, 저 또한 그러한 교육을 기획하고 실행해야 하는 일말의 책임이 있습니다. 제가 속한 분야에서 말이죠. 저는 신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신학대학원에 진학하려고 계획 중이니까 아마 교회에서 그와 같은 교육을 진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학생이나 어린이들에게 특정한 교리(doctrine)나 지식만 전달하는 게 아니라, 적절한 의미를 함께 부여하면서 말이죠. 한편, 저는 미래에 연구자가 되기를 원하므로, 논문을 집필하거나 수업할 때에 ‘학문한다는 것’의 의미를 충분히 전해줄 수 있어야겠습니다. 훗날 학생들이 아쉬움을 느끼지는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학교에 가방 메고 도착했다고 공부가 끝난 건 아닙니다. 그것처럼 피아노 건반을 손가락으로 누른다고 피아노 연주가 끝난 게 아닙니다. 곡을 완전히 소화하기 위해서는 연주자의 의미와 해석이 필요합니다. 학생이 교육의 필요성을 깨달을 때 비로소 공부가 시작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