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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딛우 Apr 28. 2024

어린 시절, 좋은 기억, 딱 하나, 여름

그런 흐릿한 순간도 해당된다면


부모님의 이혼으로, 나와 동생은 엄마와 살고 아빠는 서울에서 뭐 사업을 하네 마네 하던 시절.

주에 한 번이었나, 달에 한 번이었나? 나와 동생은 친가에 가곤 했다.


그 시절 빛바랜 필름 카메라로 찍어둔 사진을 보면 그래도 조금은 밝은 성격의 동생은 웃고 있지만,

나는 늘 죽상이다. 사실 할아버지고 아빠고 뭐고 가기 싫었던 거지, 말도 못 하고.

말할 생각을 못 했을 거다. 너무 어려서.


이제 와 친부가 밉거나 하지는 않다.

사실 뭐, 문제를 일으켰다면 여러 가지가 있었을 테지만 친부는 가정에 대한 가장으로서의 책임감보다,

제 인생을 한 큐에 개선하려 일확천금 드림을 실현하기 위한 것들이 더 중요했던 사람이기에

오히려 지금까지 연락 없이 지내주는 게 감사할 뿐이다.

어찌 되었든 안녕하기를 바라는 정도.


다시 돌아와서.

너무 오래되어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어린 시절 때마다 가야 했던 친가에 가서는

특별히 무얼 했던 기억은 없었다. 그냥 하루 이틀 밤 자고 오는 것.

친부와 할아버지와 마주 앉아 밥 몇 끼 먹는 것 정도.


*


초등학교를 갓 입학했을 때였나.

엄마와 나, 동생이 살던 집은 방 두 개짜리에 부엌이 하나 달린 작은 다세대 주택이었다.

몇몇 캐릭터성 짙은 이웃들은 기억이 나기는 하지만 명확하지 않은 정도로만 남아있는 곳.


우리는 2층이었나, 계단을 올라도 숨이 차지 않았던 기억.

아마 그쯤 살았던 것 같다.

현관문 옆으론 부엌 겸 거실이 들여다보이는 성인 손바닥 두 개로 가려질만한 네모 창이 뚫려있는,

작은 집.


친부가 거기까지 데려다주거나 했던 기억은 아예 남아있지 않다.

그날도, 뭐 데려다줬겠지, 아무튼 늦은 시간 집으로 무사 귀가한 나와 동생은 잠에 취해 비몽사몽이었던 것 같다.

우리를 데려다주고, 친부가 어떻게 가건 말건은 기억나지도 않는다.


*


그 밤은 더운 여름이었다.


늦은 새벽, 잠결에 이불 사이로 닿은 몸이 후덥지근했던 것 같은데,

칙, 칙, 분무기에서 물이 쏘아지는 소리가 들린다.

차가운 물 입자가 더운 몸 위로 기분 좋게 내려앉는다, 

그 위로 선선한 바람이 살랑이며 덥혀진 다리가 차게 식어갔다.


'시원하지?'

엄마가 팔을 괴고 옆으로 누워, 달래듯 말했던 게 기억난다.


분무기로 물을 살살 뿌려서는, 그 위에 부채로 살살 바람을 내어주고.

물에 적신 가제수건으로 몸을 덮어준다. 시원하라고.


아주 옅게 벌레 같은 점점이 작은 불빛만 창문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방 안에서.

선풍기 한 대만 제법 큰 소리로 달달대며 돌아갔다.


엄마는 이부자리의 가장자리에 누워 그렇게 반복하며 나와 동생의 몸을 번갈아가며 식혀주었다.

내 옆으론 동생이 깊이 잠들어있었고. 나는 잠결에 까무룩 했지만, 그날이 종종 떠오른다.


부모님이 같이 살지 않는 것도,

아빠와 번번이 가기 싫은 친가에 가야 하는 것도.

어린 마음에 싫은 게 참 많았던 그때였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없이.


그 순간이 참 좋았다, 그래서 서른이 훌쩍 넘어서도 여태 그날의 시원함을 간직했다.

어린 시절에 좋은 기억이 뭐 있나아-, 아무리 고민해도 정말 없었던 거 같은데.


그런 흐릿한 순간도 해당된다면 딱 하나.

고요히 선선하게, 평화로웠던 그 여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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