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전부터 공평하지 않다는 이야기
같은 나무라도
어떤 나무는 꽃을 피우고,
어떤 나무는 꽃을 피우지 못한다.
‘이 아이는 원래 이래’
우리는 꽃이 피지 않는 씨앗부터 의심하지만,
사실은 지나온 시간과
둘러싸인 환경을 먼저 들여다보아야 한다.
반복된 환경, 익숙한 상호작용,
수많은 정서 자극에
어떤 유전자가 켜졌는가의 결과이고,
그 스위치를 누른 것은 아이가 살아온 상호작용,
몸이 그렇게 반응하도록 배운 생존의 방식이다.
이건 애착형성에서 강조하는
반응성, 일관성과 더불어
안정적인 애착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는
‘민감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눈치를 챘어야 안전했고,
그래서 긴장을 놓을 수 없던 환경이었다면,
민감한 센서처럼 감정이 작동되었을 것이다.
민감함보다는 ‘예민’이나 ‘까칠’의 방향으로 흐른다.
불편한 감정이 올라와도 금방 덮어버리고,
화가 나도 별일 아니라고 넘기고
감정을 잘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감정을 느끼면 더 힘들어졌던 경험이
차곡차곡 쌓였다면 감지가 어려울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을 설명하는 후성유전학(epigenetics)에서는
모든 유전자가 다 발현되는 것은 아니며,
그 유전자가 작동하느냐 마느냐는
주어진 환경과 경험에 달려 있다고 한다.
감각처리 민감성(SPS) 이 높은 기질을 타고나면
환경 자극에 더 깊이 반응하고,
정서적으로도 민감한 특성을 보인다.
감각처리 민감성이 낮은 아이는
감정 신호를 느끼고 표현하는 데 시간이 더 걸릴 수 있다.
표현이 적다고 해서 괜찮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신호를 대신 감지해 주고
기다려주는 양육자의 태도가 절실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괜찮았던 것이 아니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놓친 것’ 일 수 있다.
순한 아이라서 키우기 편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위험한 신호일 수 있다는 거다.
어떤 특성을 가진 아이로 태어났던 출발점은 다를 수 있으나
약점을 보완하는 환경이 필수적이라는 것.
안정애착을 형성하는 핵심 환경 조건은 아이의 기질 자체가 아니라,
그 기질에 어떻게 반응하고 조율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 조율되는 환경의 기반은 주양육자의
민감한 감지력과 감정에 반응하려는 태도다.
이 태도는 부모 자신의 감정 인식 능력,
자기 조절력,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애착의 질에서 비롯된다.
나는 이것이 부모가 되기 전,
혹은 부모로 살아가는 동안
반드시 점검해봐야 할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민감성을 인식하고 수용하면,
그 약점을 보완하려는 태도가 뒤따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자기 이해는 양육의 효능감을
높이는 출발점이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양육의 어려움이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내 기질과 아이의 기질이 다르기 때문에
조율이 더 필요한 것’ 임을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비교에서 벗어나
조금 더 나다운 양육,
조금 더 우리 다운 연결을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감정에 둔감한 사람일까, 민감한 사람일까?
감정을 느껴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일까?
같은 상황이 어떤 부모에게는 자연스럽지만
어떤 부모에게는 더 많은 에너지와 인내를 요구하는 것처럼
이미 출발 전부터 공평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나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자율성의 시작이듯
안정애착의 첫 단추인 민감성도
개인마다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