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시간 속에 살고 있지만,
사실 우리 모두,
한 번은 반드시 아동기라는 세계를 지나왔다.
아동기.
기억은 희미해졌지만,
그 시절의 감정만큼은
지금도 또렷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부모가 된 우리는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다고 느낀다.
아이의 세계는 판타지로 흐르고,
부모의 세계는 현실로 흘러간다.
속도가 다르고,
시간의 단위가 다르다.
이미 어른이 된 우리는
아이들과의 놀이가 재미있을 리 없다고 느낀다.
더 빠르고,
더 자극적이고,
더 화려한 즐거움을
이미 너무 많이 알아버렸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종종
놀이를 ‘아이의 일’이라 여기고,
그저 지켜보거나,
잠시 ‘놀아주는’ 방식으로
관계를 대신하려 한다.
하지만 아이의 마음은
그렇게 쉽게 열리지 않는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도,
아이들은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끝없이 매달리고,
예고 없이 무너지기도 한다.
그럴수록 부모는 지친다.
애써 쌓아온 다정함이 무력해지는 느낌,
“이만큼 했는데 왜 바뀌지 않을까”
라는 의문이 조용히 마음을 흔든다.
그 문은 바로 '놀이'를 통해 열린다.
‘함께 논다’는 건 단순한 활동이 아니라,
아이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방식이다.
그래서 우리는,
‘놀아주는 사람’이 아니라
‘놀이하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놀이하는 부모란,
함께 머물고,
감정을 주고받으며,
아이의 리듬을 기다려줄 수 있는 사람이다.
재미를 제공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서로 연결되는 사람이다.
교류분석이론에서는
세 가지 자아 중 ‘어린이 자아’가
서로의 합의 아래 자유롭게 오가는 관계를
진정한 친밀함이라고 말한다.
놀이는 바로,
부모의 어린이 자아가
자녀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살아나는 순간이다.
부모란,
놀이하는 부모가 되어가는
끊임없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비언어의 힘을 아는 사람.
말보다 먼저 도착하는 분위기와,
표정 너머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
아이의 세계에 들어서는 그 문 앞에서
지문을 대지도 않고,
비밀번호를 누르지도 않는 사람.
대신,
정서를 사용할 준비를 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놀이하는 부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