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곰돌이 May 04. 2021

에스컬레이터 대신에 계단을 타는 남자

편리함과 건강이라는 양심 사이에서

"이번 역은 대전역, 대전역입니다."

치익-

저벅저벅저벅


수많은 사람들이 지하철에서 내린다.

다들 KTX를 타고 어딘가로 떠나는지 짐이 한가득이다.

우르르 몰려나와 선착순 내기라도 있는 듯 다들 에스컬레이터에 모여든다.

누가누가 빨리 타나 서로에게 닿지 않게 밀치며

쇼트트랙 마지막 주자라도 된 듯 앞발을 에스컬레이터에 쑤셔 넣는다.


 에스컬레이터 맛집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지나쳐 얼른 계단에 내 오른발을 올린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3층 높이의 계단을 등산하듯 저벅저벅 오른다.

내 옆에 느릿느릿 거북이처럼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흘끔흘끔 바라보며 마치 거북이를 이기는 토끼가 된 듯 다리를 바쁘게 움직인다.


다른 사람들이 편하게 에스컬레이터로 지상에 도착했을 때면

나는 가쁜 숨을 고르고 땀을 닦으며 다시 갈길을 재촉한다.




요즘엔 지하철을 탈 일이 별로 없지만

과거에 한창 지하철을 많이 탈 때면 언제나 에스컬레이터 대신에 계단을 이용한다.

아무리 에스컬레이터 타는 사람이 없어도, 계단이 아무리 높아도

약간의 강박적으로 계단을 타고 올라간다.


어떻게 그리고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계단만 이용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에스컬레이터에 사람이 너무 많아 기다리기 힘들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나는 왜 에스컬레이터 대신 계단을 타는 것일까?'


계단을 탈 때면 이런 생각들을 하곤 했다.


'나는 젊으니까.'

'나는 키 크고 건장한 남자니까. 에스컬레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해야지.'

'계단 1개를 오르면 수명이 1초씩 증가한다고 하니 건강해져야지.'

'평소 운동을 못했으니 운동삼아 계단을 올라야지.'


그리고 계단을 빠르게 오르면서 에스컬레이터 타는 사람들에 대한 약간의 우월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나는 건장하고, 큰 키로 계단을 에스컬레이터보다 빨리 오를 수 있고,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운동을 좋아하며, 더 건강해질 것이다.'

뭐 이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면 참 어리석고 어리고 철없는 생각이었다.

의욕만 넘치고 으스대기 좋아했던 철없는 어린날의 내가 저지른 잘못된 망상이었다고 생각하자.




지금은 좀 다른 이유로 에스컬레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한다.

이젠 정말 순수히 건강을 위해서다.

허벅지로 계단을 밀며 다리를 펴고 엉덩이 뒤쪽 근육이 펴지는 느낌을 느끼며

계단 하나하나가 운동을 위한 스텝이라고 생각하며 올라간다.


그리고 힘들 날이면 계단 대신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기도 한다.

더운 여름이면 최대한 땀을 흘리지 않으려고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한다.

전에 없던 철과 융통성이 생긴 것이다.


에스컬레이터 대신에 계단을 타는 남자는

에스컬레이터도 타고 계단도 타는 남자가 되었다.



이전 01화 자잘한 즐거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