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1
지금 꽃향기가 흘러넘치는 나의 공간에는 원래 아무 향이 없었다. 아무 향이 없었다기 보단 그냥 퀴퀴한 느낌이 더 강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오늘의 미세먼지 농도를 앱으로 확인 후 창문부터 여는 것이다. 창문을 열면 시원한 공기가 듬뿍 들어와 개운해지는데, 요즘은 미세먼지 있는 날이 별로 없어 공기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혹시 생각해보면 이것도 코로나의 여파인가 싶다.
예전엔 사람들이 왜 꽃이나 식물을 키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흔히 말하는 돈이 나오나 쌀이 나오나의 수준이 아닌 '그걸 하면 좋아?'라는 물음으로서 행위의 근본적인 것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집 근처에는 꽃집이나 화원들이 많이 있다. 종종 지나가는 차량 안에선 저걸 하면 굶어 죽지 않나 싶은 생각을 해보았는데, 그저 완벽히 생산성에 기인한 나의 짧은 생각이었다.
'어느 이'가 선물해준 꽃으로 내가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에 큰 변화가 생겼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무언가를 바라보고, 느끼고, 호흡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내가 늘 쫓기며 살아왔던 생산성과는 다른 것이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 정리해 보면 나에게 생산성이란 것의 의미는 그 안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며 다투는 것이고, 경주마와 같이 앞만 보고 달리게끔 가리개를 씌워 놓은 그런 뜻이다. 당연히 그 속에는 한치의 여유조차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꽃이나 식물을 바라보는, 어쩌면 '방관'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이 관찰자의 행동은 생산성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누군가, 무언가 혹은 어떤 것들에서 치열과 경쟁 그리고 경주는 없으며 그저 방관만이 있을 뿐이다.
생산성과 방관. 이 두 단어는 정확하게 다른 성격을 띠고 있는 만큼 사람들의 인식과 마음속에 와 닿는 것도 확실하게 다르다. 내가 살아온 과정과 삶 속에선 생산성은 늘 선두에 있었고 어느 것도 이것과는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을 만큼 첫 번째였다. 대학 교수님들과 과거 회사 선배들의 말속엔 생산성이란 인풋과 아웃풋인데, 한글로 썼을 때 아웃풋이 한 글자 더 많은 이유는 작은 투입으로 하나라도 더 많이 나와야 한다는 걸 뜻한다고 하였다. 그것을 듣곤 말재주가 좋다며 우러러봤을 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말재주는 정말 좋았던 것 같다.
방관은 악이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회의 병폐요 질병이며, 암이다. 나의 삶과 사회생활은 이것을 그렇게 표현하며 평가절하했다. 무언가 일이 있으면 생각할 시간에 뛰어 들라하며, 일단은 저지르고 뒷수습하기 바쁘다. 여기서 뒷수습의 몫은 부하직원들의 것인데, 진짜 일이란 것을 만드는 능력과는 별개의 능력이다. 이렇게 잠시 무언가를 바라보며 느낄 '방관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꽃 선물은 정말 몇십 년 만에 받아보는 것이다. 초, 중,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를 졸업할 때 받아보곤 그 뒤로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세월 속에 잊혀 있던 것이었고 나의 세상과는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빛과 향을 피우면서도 관찰자의 어떤 행동이나 행위에도 아랑곳하지 않지만 스스로의 내음을 사방으로 뻗어내는 그것을 볼 때 나와 이 시대를 같이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 속에 방관의 시간은 얼마나 있었는지, 또 얼마나 있는지 궁금해졌다. 나는 가만히 꽃을 바라보았고 향은 내 공간 속에 가득히 퍼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