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할머니가 갑자기 위독해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할머니와 떨어져 산지도 벌써 4년이 다 되어갔고 그 동안 할머니는 몇 차례 요양원을 전전하셨다. 요양원 특유의 생기 없는 분위기와 헤어질 때 먼발치서 서운해 하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괜스레 불편해서 요양원에 간지도 꽤 오래되었었다. 언젠가부터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지셨던 할머니는 '내가' 보고 싶다고 거듭 얘기하셨던 모양이었고 나는 할머니가 의식을 잃고서야 할머니를 찾아뵈었다. 호흡기에 의존한 채 가쁜 숨을 내쉬는 할머니는 추위에 떠는 가냘픈 동물 같았다. 그렇게 할머니를 보고 돌아온 날, 그 날 저녁에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그 뒤로 나는 정신없이 장례식에서 하루 종일 일손을 거들었다. 가족을 제외하고는 할머니의 손님은 하나도 없는 바쁜 장례식이 끝나고, 관을 운구차로 옮기기 전 모두들 할머니의 관을 붙잡고 오열을 했다.
그 때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 슬프지가 않은 것일까. 심지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마치 당연한 사실인 듯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래도 할머니와 산 세월이 있는데…. 눈물이 안 나오는 것에 그제야 조금 당혹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고모들이 '엄마,엄마..!' 하는 소리에 눈물이 북받치듯이 왈칵 흘러나왔다. 할머니의 죽음이 슬퍼서가 아니라 8년 전 죽은 엄마가 생각나서였다. '엄마, 엄마'하고 부르는 그 소리가 마치 8년 전의 어린 나의 목소리 같이 들려서, 순간 아득해졌다. 엄마가 죽은지도 벌써 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할머니의 죽음 앞에서 다시 그 시절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사십대의 젊은 나이에 엄마는 병으로 내가 중학생 때 세상을 떠나셨다. 그 빈자리를 채운다는 명목으로, 그리고 아버지가 장남이라는 명목으로 혼자 사시던 할머니는 엄마가 없는 안방으로 들어오셨다. 할머니는 본래 성정이 까다로운 부분이 있으셔서 할머니의 자식들도, 며느리도 할머니를 편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 할머니와 엄마 없는 자식들이 같이 산다는 것은 생각만큼 잘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할머니가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주기를 내심 기대했었지만 할머니는 나에게 손녀이자 동시에 며느리의 역할도 하길 바랐다. 나는 그런 할머니의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어 버릇없이 굴었고 할머니도 나에게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많이 주었다. 할머니와 살았던 그 시절, 나는 지금도 어떻게 견뎌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엄마가 없는 집에, 아버지도 남동생도 많이 힘들었겠지만 '여자'인 내가 겪는 감정은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아버지도, 친척들도 모두가 엄마가 없는 집에는 그 딸이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고작 열네 살이었고 죽은 엄마를 생각하면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녀였다. 그래도 꾹 참고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고, 할머니를 신경써야했고, 학교에서는 나름대로 명랑한 척을 하며 지내야했다. 거기다가 예민하고 깔끔한 아버지는 집이 더럽다고 엄마에게 그랬듯이 똑같이 나를 나무랐다.
나를 동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집안사람들의 다양한 요구를 온 몸으로 받아내면서 나는 어느새 엄마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엄마의 입장이 되어보니 엄마가 더욱 가엾고 불쌍했고 나 역시도 불쌍했다. 콩쥐는 아닌데 콩쥐처럼 살았다. 콩쥐가 계모와 언니들의 구박에 혼자 울었듯이 나는 할머니와 아버지가 주는 스트레스에 매일 밤 베개를 적셨다. 나도 엄마를 따라 죽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죽은 엄마만이 내 마음을 알아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건 학교생활 때문이었다. 죽은 엄마를 대신하듯, 친구들은 나를 많이 좋아해주었고 극심한 스트레스에도 학교 성적은 잘나왔다. 그렇게 원만한 학교생활 덕에 꾸역꾸역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
그 뒤, 원하던 대학에 들어가고 어둡던 내 인생에도 조금씩 빛이 스며들었다. 먼저 할머니가 건강이 안 좋아져 요양원으로 가셨다. 할머니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정말 살 것 같았다. 숨통이 트인 기분이었다. 그리고 대학을 다니면서 나는 자유를 실감했다. 공부하는 것이 즐거웠고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재미있었다. 하지만 대학 2학년이 되던 해, 나는 아버지와의 팽팽한 신경전으로 또 다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여전히 나에게 '엄마'가 되기를 요구했다. 집에 돌아오면 항상 집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기를 바랐고 예민한 성격으로 항상 이것저것을 따졌다. 그에 비해 나는 간단한 집안일만 하면 된다는 주의였다. 그것보다는 학교 성적이, 내 꿈이, 내 인생이 훨씬 중요했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오래 전에 짓밟아버린 '나'를 되찾고 싶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면서도 나에게 계속 역할을 강요했다. 그 해, 나는 아무도 모르게 다시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들기 시작했다. 내 인생에 자유는 없다, 나는 '나'로 살 수 없다…. 창살 없는 감옥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참으로 편해보였다, 매일 엄마가 지어주는 아침밥을 먹고 어리광도 부릴 수 있다니…. 나에게는 그런 어른이 없었다. 자신의 편의를 위해 나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참으로 '약한' 어른들만이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부터 반복되는 지독한 악순환, 나를 포기하면 가정의 평화를 얻지만 참을 수 없이 불행하다. 반대로 나를 내세우면 가정의 평화가 없다. 재수 없게 여자로 태어나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야 될까, 부모 복이 없는 것을 탓해야 할까, 나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일까? 그렇게 계속되는 스트레스에 나는 새장 속의 새가 되어 창밖만 바라봤다.
하지만 비가 그치면 구름 뒤에서 해가 뜨듯이 그런 우울함도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고 어느새 아버지와의 마찰도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언제부터인지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내 내면의 소리에 집중할 수 있게 된 후였던 것 같다.
너무 일찍 불행을 겪은 탓인지 나는 항상 내 환경만을 탓해왔다. 엄마가 없어서, 할머니 때문에, 아버지가 별나서, 모든 것을 불행한 가정 탓으로만 돌리고 내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 불행 속에서도 내 자신이 얼마나 강했었던가를, 불행을 하나 둘 헤쳐 오면서 내 영혼이 얼마나 단단해졌는가를. 그리고 깨달았다. 자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도, '나'를 잃었다고 생각했던 것도 모두 내가 만든 부정적인 생각일 뿐임을, 내가 내 자신을 믿지 못해서, 격려하지 못해서 우울해졌던 것임을. 의지할 사람 하나 없었지만 그 대신 '나' 에게 '나'를 의지하고 그렇게 살았던 것을…. 진정한 자유는 이미 내 속에서 자라고 있었음을….
그렇게 나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고 나니, 싫었던 아버지도 부인을 일찍 떠나보낸 불행한 한 남자로서 안 된 마음이 들었다. 아버지가 나에게 엄마 역할을 요구했듯이, 사실 나도 아버지를 항상 무시하며 말 한번 섞지 않았음을 반성하게 되었다. 마음이 점점 편안해져갔다. 내 자신을 믿는 다는 것이,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마음의 힘으로 살아왔다는 것이 이제는 자랑스럽다.
장례식이 완전히 끝나고, 고모들은 우리 집 안방에서 할머니의 옷가지를 정리했다. 둘째 고모가 나에게 '후련하겠다'라며 웃음을 짓는 순간, '아, 그래, 슬픈 게 아니라 후련했던 거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할머니를 생각하면 무의식적으로 항상 그 시절의 어두웠던 나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래서 할머니를 보내며 나는 내 자신의 일부를 보낸 것이다. 슬프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할머니에 대한 원망이 아닐까도 생각해봤다. 그러나 원망은 지금의 나에게는 별로 남아있지 않다.
누군가를 원망한다는 것은 곧 내 자신을 원망하는 것과 똑같은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후련하다고 말하는 손녀가 또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는 정말 후련하다. 그리고 할머니가 좋은 곳으로 가셨기를 바란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엄마도 그곳에서는 편안하시기를 바란다…. 두 분 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응원해주셨으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