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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르쯔 Feb 17. 2021

아, 몰라, 그냥 짜증나.

  사람을 연구하고 관찰하며, 표현한다는 점에서 소설가와 심리학자는 비슷하다. 예전에 소설가 김영하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소설을 쓰는 학생들에게 졸업할 때까지 '짜증 난다'는 말을 금지시켰어요.

감정을 글로 표현해야 하는 작가는 사람의 마음을 명확하게 쓰는 것이 중요한데 '짜증 난다'는 말에는 너무나 많은 감정들이 뭉뚱그려져 있어요.

예를 들어, 생일인데 엄마가 미역국을 끓여주지 않았을 때의 서운한 감정도, 백화점 화장실에 휴지가 없을 때 황당하고 화가 나는 감정도 '짜증 난다'는 한 마디로 표현해버려요.


 상담 장면에서도 비슷하다. 우리는 대부분 개인의 정서 체계에 대한 이해가 없다. 감정을 잘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정서는 무의식적이며, 빠르고 암묵적이다. 상황이나 패턴에 따라서 의식적인 부분들도 존재하지만, 최소한 치료적으로 중요한 정서는 의식적 사고에 의해서가 아니라 복합적인 내적 패턴에 의해 자동적으로 활성화된 정서다.


 우리는 미처 깨닫기도 전에 상대의 동작, 표정, 말, 행동 등에 강력하게 반응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하는 정서 이면에 존재하는 의미와 연결망을 한겹씩 벗겨내다 보면 근원에 자리 잡은 감정, 욕구, 목표가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다.


 쉽게 이야기하면, 감정은 본능이고 그러한 감정에 '나'가 의미를 부여한 그 무언가가 '정서'라고 할 수 있다.


 연락이 되지 않다가 집에 늦게 들어오는 딸에게 불같이 화를 내는 엄마의 분노 뒤에는, 딸이 다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다.


 공을 쫓아 갑자기 차도로 뛰어든 아이를 혼내고 엉덩이를 때리는 엄마의 분노 뒤에는, 아이가 사고로 죽거나 다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다.


 그래서 상담사는 자신의 정서를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안내한다. '외로움'을 느낀다면 경제적 외로움인지, 관계적 외로움인지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렇게 '나'의 정서 상태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와 표현을 할 수 있어야만 다른 사람의 정서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아, 저 사람의 분노 뒤에는 저런 두려움이 있겠구나. 그래서 저 사람은 화를 내고 있구나.


 아, 내가 생각할 때 비정상적인 저 사람의 반응 뒤에는 수치심이 있구나.


 아, 저 사람의 관계에 대한 집착 뒤에는 외로움이 있구나.


 글과 말도 그렇다. 내가 모호하다고 느끼는 것을 나도 모르게 모호하게 쓰고 말한다. 모호함은 우리의 진짜 마음을 숨겨준다. 결국 억압하고 모호한 표현으로 한 구석에 밀어놓은 마음은, 쌓이고 쌓이다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터져 나온다. 어떤 사람은 과격한 행동으로, 수치심으로,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로, 당황스러운 분노 등으로 말이다.


 인간은 두려움에 대한 대상과 대처 방법이 명확하지 않을 때 불안을 경험한다. 마음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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