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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르쯔 Apr 29. 2023

마음을 위한 응급조치 방법

 최근에 제법 큰 우울이 찾아왔었다. 아무래도 상담 분야에 있는 사람이다 보니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서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방법이 유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우울은 '어림없지 이녀석'과 같은 태도로 나를 무너지게 만들었다. 당시에는 정말 이렇게 우울에 먹히다가는 삶이 무너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결정적인 시기가 있던 것도 아닌데 정신 차리고 보니 우울이 옆에 앉아 있었다. 정말 이런 느낌이었다. 오는 줄도 몰랐다. 


 부정적인 생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떠오르고 심장은 점점 빠르게 뛴다. 정서는 점점 마비되어 가고 표정은 단순해진다. 맛있는 걸 먹어도 즐겁지 않고 재미있는 것을 봐도 그저 그렇다. 나에게만 세상의 부정적인 필터가 적용된 것처럼 그 무엇을 해도 무기력해진다. 눈을 감으면 두려운 것들이 더 선명하게 떠올라서 잠을 잘 수도 없다. 이렇게 머릿속은 엉망진창이 되어가고 점점 무감각해지며 모든 것들이 의미가 없다고 느껴진다. 살면서 처음 겪는 느낌도 아니지만 수십 번을 경험했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나는 비교적 스스로의 마음에 대한 인식과 관리가 뛰어나다고 생각해 왔는데 예외는 없었다. 다만 응급환자의 '골든 타임'처럼 마음의 응급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적절한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가까스로 내가 아는 방법들을 모두 끌어다 마음에 응급조치를 했다. 위기를 너무 기고 나서 새삼 들었던 생각은  '방법조차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은 정말로 조용히 죽어갈 수도 있겠다'였다.  


 서론이 길었다. 내가 사용한 방법은 과거 프로젝트 형식으로 제작했던 심리카드의 질문 중 하나였다. 오늘은 내가 우울할 때 이 질문들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경험을 공유하고자 한다.


수십 개의 질문이 있지만 이 중 내가 사용했던 것은 다음의 질문들이었다.


- 당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요?

- 당신이 가장 화가 나는 것은 무엇인가요?

- 당신은 오늘, 한주, 한 달 동안 에너지 100을 어떻게 소비했나요?


 가급적이면 질문들을 보면서 컴퓨터로 타이핑 하든 종이제 적든 무엇이라도 좋으니 단순히 생각하는 것보다는 입력하거나 적는 것이 좋다. 방법은 이렇다. 누군가에게 평가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선은 생각나는 대로 질문에 대한 답을 적는다. 막 적어야 하는 이유는 나 자신에게 솔직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 순간만큼은 스스로에게 거짓말하지 말자. 그리고 답 옆에 정서를 쓴다.


슬픔 / 분노 / 두려움 / 절정감(고양감)/ 불확실감 / 낙담한 / 무가치감 / 수치심 / 불안전감 / 무기력감 / 무망감 / 격노 / 절망 / 만족감 / 겸손 / 기쁨 / 행복함 / 


 이 외에 떠오르는 다른 정서의 이름들이 있다면 사용해도 좋다. 중요한 점은 정서의 이름을 통해 내가 무엇을 느끼고 경험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다시 옆에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를 적고 실천한다. 이것이 전부다.


예시.


1. 당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요?


1)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경제적 어려움이다. -수치심, 불안전감, 절망 -> 

수익을 확장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본다, 적은 금액이라도 좋으니 일을 늘린다 등..


2) 다른 사람에게 편하게 베풀지 못하는 것이다. - 낙담한, 무가치감 -> 

- 1)을 실천하고 사소한 음료수나 커피 하나라도 지인들에게 내가 베푼다. 대신 아까워하지 않고 기분 좋게 베풀기!


3)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다- 슬픔, 두려움, 절망 ->

- 나를 증명할 수 있는 일들을 한다.

- 추가적인 자격증 공부를 시작한다. 작은 단위인 하루에 1페이지라도 보기.

-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글을 쓴다

 

 위의 예시는 간략하게 나타낸 것이고 직접 할 때는 목록에 대해 떠오르는 추가적인 생각들을 메모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더 길게 내용을 써도 좋다. 


정리하자면 핵심은 이렇다. 


1.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정말 솔직하게 나를 속이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적는다. 

2. 목록들에서 느낀 정서들을 생각나는 대로 적는다. 이때 숫자나 색깔, 그림으로 표현해도 좋다.

  예) 내 수치심은 1~10중 8이고 색깔은 분홍색이다.

3. 목록들을 위한 현실적인 해결 방법들을 고민해 보고 '가장 작은 단위'를 적고 실천한다.

 예) 자격증 책을 사서 하루 5줄씩만 본다.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의 가장 작은 단위를 적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울함 속에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다. 그래서 최소한의 힘만을 사용하는 것이다. 사소하지만 하루하루 해낼수록 당신의 마음이 회복할 확률은 점점 올라간다. 


 이 방법은 어디까지나 '응급조치'다. 응급조치를 했으면 병원을 가야 한다. 물론 이 방법만으로도 좋아지는 사람이 있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더 나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나의 심리적 문제에 대해서 인식은 할 수 있다.  알아차렸고 혼자서는 도저히 안될 것 같을 때는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 또는 장소를 반드시 찾아가야 한다.


알아차리지 못했던 지금이 상처받은 마음의 '골든타임' 일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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