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드려야 나오는 글
과연 외할머니가 우리 엄마에게 섭섭한 게 개불일까? 치매에 걸린 외할머니를 몇 년을 정신이 오락가락하신 채로 지내셨는데 어느 날 엄마에게 개불이 먹고 싶다고 했다. 우리 엄마가 농사일로 바쁘기도 했고, 개불을 시장 가면 흔하게 구할 수 있는 바닷가 마을도 아니고, 이도 성치 않은 사람이 무슨 개불을 먹을 수 있겠어해서인지 엄마는 개불을 일하다 말고 사러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외할머니의 마지막 부탁이 될 줄이야. 엄마가 개불을 파는 횟집 앞을 지날 때 외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먹고 싶다고 한 걸 못 사드렸어하고 마음 아파했다. 그런데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외할머니가 엄마한테 진짜 섭섭한 게 개불 맞을까? 엄마는 전혀 예상 못한 다른 일로 섭섭해 할 수도 있는데. 아니면 엄마가 나에게 그렇듯이 이제 나는 간다. 그렇지만 너는 잘 살거라. 오히려 자기가 못 해준 걸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내가 오해한 섭섭함이 뭐가 있을까 생각을 시작했다. 상대방이 이건 정말 나한테 섭섭하다고 느꼈을 거야 라고 추측하는 것들. 아니면 너는 내가 섭섭해하는 게 이거 때문이다라고 하겠지만 사실은 아닌 걸 같은 것들.
글이 나오려면 누군가 나를 톡톡 건드려야 한다. 글을 쓸 때는 외부의 자극이 아주 큰 도움이 된다. 나에게 있어선 대학 수업이 큰 자극제다. 공자는 40세를 불혹[不惑]이라 부른다고 한다.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는 나이기 때문이다. 30세는 이립[而立]으로 모든 기초를 세우는 나이다. 모든 기초를 세워야 한다는 건지 모든 기초가 선 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 40세도 마찬가지로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걸 과업으로 삼고 달성을 하라고 하면 이해를 하겠다. 그런데 40이 되면 저절로 저렇게 된다고? 저절로 나이가 든다고 지혜로워 질까?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몰라도 이 기준대로 라면 나는 나이 값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게 확실하다. 그리고 나의 남편도 마찬가지다. 이제 몇 년 후면 내 남편은 정확하게 40이 된다. 지금 37살이니까 3년만 있으면 벌어질 일이다. 하지만 내 남편은 여전히 세상일이라는 바람이 자기를 흔들면 정신이 비닐봉지가 되어서 펄럭거린다. 공자는 나이 드는 것을 밑도 끝도 없이 예찬해서 문제지만, 베 칠리오 티치아노는 나이 드는 것을 너무 극단적으로 부정적으로 나타내서 문제다. 베 칠리오 티치아노라는 이름은 수업시간에 한 학생이 죽음에 대해서 발표할 때 처음 들었다. 이 화가가 그린 그림을 보여줬는데, 인간의 세 시기를 나타낸 작품이었다. 이 그림 속에는 인생의 축제를 즐기는 청년과 해골을 들고 있는 노인이 나온다. 두 손에 해골을 들고 있는 등이 굽은 채로 땅바닥에 주저앉은 노인이라니? 노년기가 죽을 날만 기다리는 힘없고 초라한 기간인가?
교수님의 수업 없이 학생들의 발표로만 진행되는 윤리학 시간이었다. 발표자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대해서 설명했다. 발표 내용 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인간은 선한 행동을 하도록 교육받을 수 있고, 또 그러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선한 행동이란 무엇일까? 선하다의 기준은 누가 세우는 거지? 절대적으로 누가 봐도 어떤 상황에 데려다 놓더라도 시대가 변하고 상식이 바뀌어도 여전히 선한 것이 있는가? 마음속의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점 커져갔다. 발표가 끝나고 질문하는 시간이 되었다. 질문을 하는 사람은 내용에 상관없이 가산점을 받을 수 있다. 발표가 끝나자마자 1,2,3,4,5,6,7,8 질문자 순서가 선착순으로 정해졌다. 한 남학생이 한 질문에 나는 또 자극을 받았다.
‘인류의 삶 전체를 놓고 볼 때 98%가 원시시대였습니다. 남자는 사냥을 하고 여자는 채집을 했죠. 인간은 종족 번식을 위해서 생존을 위한 욕망으로 움직이지 않나요?’
그래, 나도 진화심리학에는 관심이 있어서 조금 알고 있다. 그런데 대체 유전자란 건 현대시대에 발맞춰 빨리빨리 전환이 왜 안 되는 걸까? 그런데 종의 번식으로만 인간이 설명이 되나? 비혼 주의자나, 자발적으로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 동성애자, 성 불감증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마치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유전자로 정해졌다, 여자는 채집 생활과 육아에 적합하다는 한계를 짓는데 좋은 구실만 제공하는 건 아닌가? 질문이 모두 끝나고 나서 교수님이 동물은 생존과 번식만 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동물은 주는 대로만 먹는다고 하는데, 우리 강아지는 주는 대로 먹지 않는다. 자기가 원하는 음식이 나올 때까지 먹기를 미루고 밥그릇 앞에서 조용한 시위를 벌인다. 인간의 행복과 동물의 행복은 동일하다. 동물도 지성이 있고,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 동물도 이성적인 영혼의 활동을 한다. 단순히 서로의 언어가 다르다고 해서, 우리가 동물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가 우월한 건 아니다. 동물의 언어가 없는 게 아니라 우리가 동물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할 뿐이다. 동물이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은 이상한 소리만 해댄다고 생각하는 건 피차 마찬가지다.
젠더이슈(gender issue)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내가 동성애자라고 했죠?’라는 말을 했다. 내가 잘못 들었나 순간 귀를 의심했다. 왜 교수님은 자기를 동성애자라고 말했을까 호기심이 생겼다. 그리고 나는 왜 그 말을 분명히 듣고선 내가 잘못 들었나 의심하고 있는 거지? 당연히 여기 앉아 있는 모든 사람이 이성애자일 거라고 생각한다. 이성애가 아니라 동성애라는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럴 의도가 아닌데 나도 모르게 동성애자를 불편하게 만든 것이다. 내 이런 차별적인 태도는 어디에서 나온 걸까? 동성애자인 교수님은 가만히 있으면 이성애자인 척하고 있는 게 되어버린다. 그래서 말해야만 했을까? 사람들이 자신을 당연히 이성애자로 볼 게 뻔하다는 걸 이미 본인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나는 당연히 보통 사람은 다 이성애자라고 생각하게 됐을까? 동성애가 사회 전반적인 성적 취향이었던 때도 있었다. 다음 시간이 되었다. 여자의 재산권이 없던 시기를 설명했다. 여자가 벌어들이는 모든 수익은 남편이나 아버지의 재산이었다. 이 설명을 하면서 또 교수님이 말했다. ‘아버지가 억대 부자인데, 내가 결혼을 안 해서 재산을 못 받고 있어요.’ 자기 이야기인 것처럼 책 내용을 설명하는 게 교수님 버릇이었다. 어쨌든 동성애자인 교수님은 왜 자신을 수업시간에 동성애자라고 밝혔는가에 대한 글을 한편 마무리했다.
동아시아 사상 수업시간에는 불교사상을 배웠다. 인간은 오감이라는 한계에 갇혀서 어떤 것이든지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했다. 차를 몰아 학교에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에 차에 치여 죽은 강아지를 봤다. 머리는 일그러져 있었고, 몇 시간 전에 흘린 것 같은 선명한 피가 머리 밑으로 고여있었다. 너무나 가엽고 안타까운 마음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얼른 시청에 전화를 해서 사체가 다시 다른 차로 훼손되지 않도록 해 주시라고 민원을 넣었다. 과연 나는 살인무기를 몰고 있구나. 이 차 안에 들어앉아 네 바퀴를 굴리면서 언제든 이 차로 뛰어드는 동물을 죽일 수 있다. 마음이 매우 안 좋았다. 그리고 같은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햇빛을 오랜 시간 받아 딱딱하게 말라붙은 검은 형체를 봤다. 고양인지 개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 이미 마를 대로 마르고 훼손될 대로 훼손되어 이제 자연에 가깝다고 봐야 할 그런 형체. 나는 아무런 죄책감이나 가여움도 느끼지 않고 그 위를 밟고 지나갔다. 과연 불교에서 배운 대로 나는 내 눈에 보이는 대로 감정이라는 걸 불러내고 있지 않나 싶었다. 해외에서 배가 침몰해서 한국인 선원 여러 명이 동시에 목숨을 잃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뉴스로 처음 소식을 접하고, ‘아, 그렇구나.’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면서도 나는 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죽었다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지 걱정이 들었다. 이제 나이가 들고, 세상살이에 시달리다 보니 감성은 다 메마르고, 내가 소시오패스가 된 거 아닌가 하는 괜한 불안과 걱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들이 내 에세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