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글쓰기 기법은 잘 모른다. 그냥 내 눈에 보기 좋은지, 내가 맛을 봐서 맛있는지 간만 보는 정도만 할 줄 안다. 이 재료는 3cm 정도로 깍둑썰기를 해주시고 물과 기름의 비율은 3:1로 하시고 이런 건 잘 모르기도 하고 못한다.
초고를 완성할 때까진 이런 글쓰기 기법이 나에게 딱히 필요하지도 않다. 처음 막 원고를 써 내릴 때는 이런 글들로 가득하다.
설명이 부족하거나 주제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은 글
근거가 부족해서 논리적인 비약이 있는 글
다 필요한 내용인데 배열이 제대로 되지 않은 글
이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초고는 막 사람의 형체를 만들어보려고, 커다란 찰흙 덩어리를 바닥에 털썩 주저앉히는 일과 동일하다. 예술가의 손에서 하나의 완성된 작품이 나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동상을 만드는 데 있어서 얼굴 생김새 하나하나 상세하게 묘사하고 매만지는 일은 아주 나중의 일이다. 실제로 출판사에 출간 제의하면서 보냈던 원고는 책으로 편집하는 과정에서 60% 이상 완전히 다시 고쳐 썼다.
나의 첫 에세이 [나를 없애버리고 싶을 때]는 불교사상을 기반으로 썼다. 34살에 철학과에 편입해서 고작 1학기를 다녔을 때였다. 이 정도만 알고 써도 될까? 또 나랑 안 맞는 내 친구(나의 뇌)가 한 마디를 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아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부처님 빼고 나머지 인간들은 모두 중생이다. 인간은 원래 부정적으로 태어났고, 순간의 느낌에 집착하면서 피로와 권태를 견디며 산다. 인간의 자신의 감각과 선입견으로 특정한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재편집하고 재구성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피로와 권태를 견디면서 사는지 그리고 어떤 감각과 선입견으로 상황을 재편집하고 해석하고 있는지 마음껏 써도 문제가 되지 않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누구나 그러니까.
그냥 손 가는 대로 글을 마구 써냈다. 이렇게 썼는데도 철학적인 설명이 들어가는 부분에서는 어김없이 출판사로부터 관념적이고 어렵다는 비평이 돌아왔다. 내가 조금 더 철학 시간에 배운 이론을 녹여볼까 하고 쓴 부분만 어찌나 쏙쏙 잘 골라내시는지 여기가 어려우니 다시 고쳐야 할 것 같다고 하셨다. 그래서 완전히 나의 이야기로, 나는 이렇다는 방향으로 글쓰기 방향을 정착시키고, 독자가 읽기에 편안하고 좋은 책이 나왔다.
‘수건과 에이즈’에는 내 책상 밑에 쌓인 머리카락과 얼룩이 그대로 남은 내 수건을 보고 에이즈에 걸리겠다면서 화를 내고 나간 한 친구의 이야기를 담았다. 빛바랜 수건이 걸려있는 걸 보면 어김없이 에이즈라는 방아쇠가 당겨져 그 당시 상황이 떠올랐다. 이 말을 한 당사자는 아마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에서야 상대에게 말을 걸어 그때 그런 말을 해서 나는 크게 상처를 입었다고 말한 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다. 다만 그냥 그때 나로서 할 말을 제대로 못한 미련이 남다 보니 이렇게 글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지금은 나와 상대는 그때 그 상황 속의 사람들이 아니다. 22살의 나와 34살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나로서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으니 그때의 나로서 내가 가진 생각들을 풀어낼 뿐이고, 내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결국 나만의 진실이기 때문에 소설 같은 허구라고 봐도 무방하다. 어쨌든 이 글을 쓰면서 케케묵은 상처가 치유되기도 했다. 그래도 내 책에 쓸 이야깃거리를 하나 준 거니까 내 인생에 도움을 줬네 이렇게.
상대방의 진실만 상대와 나에게 알려지고, 나의 진실은 표현하지 못한 아쉬움 내지 원망이 남았을 때 세상에 나의 진실이 뭐지 띄어 보낸다. 당신의 진실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