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 제목을 나를 없애버리고 싶을 때라고 지었다. 정말이지 나를 없애버리고 싶을 지경일 때 이 책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자살을 하고 싶다, 목숨을 끊으려고 한다는 건 아니다. 남편의 어머니는 첫 책인데 제목이 좀 세다고 넌지시 조심스럽게 말씀했다. 이 에세이 책의 서평단을 모집할 때도 한 신청자가 이렇게 말했다. 제목으로만 보면 매우 자학적으로 비친다고. 나를 없애버리고 싶을 때란 제목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1. 내가 부끄러워서 어디 숨고 싶다.
2. 내가 나를 지키지 못한 것에 짜증 나고 나 자신이 싫다.
3. 나의 어떤 부분을 없애고 싶다.
4. 나라는 존재가 어디 땅으로 꺼졌으면 한다.
5. 다음 날이 안 왔으면 하고 아침에 눈을 뜨고 싶지 않다.
6. 나라는 불완전한 인간이 불완전성을 벗었으면
7. 남에게 보이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낄 때
8. 과거의 나에서 그만 벗어나고 싶을 때
내 의도는 이거였다. 예전 일에 매달리는 나를 없애고 싶다. 나라는 존재 자체를 없애고 싶은 게 아니라 지나간 일에 매달리는 부분을 없애버리고 싶다고. 그래서 나의 답은 8번이다. 그런데 만일에 이게 자살을 암시한다고 하더라도, 과연 불온하고 이상하기만 한 일인가? 어떤 의미로는 자기 스스로 죽을 때를 결정하고, 유전자에 새겨진 생존본능을 뛰어넘는 건 대단한 자기 주도권 행사라는 생각도 든다.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애써 그런 마음을 무시하고 ‘나는 혼자가 편해.’라고 자위하는 홀로 있음은 사람을 쓸쓸하고 꿀꿀한 기분이 들게 만든다. 표현하지 못한 원망이 쌓여 세상에 담을 쌓고 싶은 상태다. 하지만 완전한 홀로 있음은 어떤가? 남과 있어도 되지만 혼자 있어도 충분히 훌륭하고 만족스러운 상태다. 둘 다 똑같이 혼자 있다는 사실은 동일하지만, 그 속에 들어앉은 마음이 완전히 다르다. 그것처럼 자살도 마찬가지 아닐까? 표현하지 못한 원망이 쌓여서 세상을 등지는 것과 자기 스스로 죽을 때를 결정하고 자기 주도권을 행사하는 자살은 서로 결이 확연하게 다르다.
밤늦게 강의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운전하는 차 보조석에 앉아서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아, 그러고 보니까 불교에서 해탈한다는 건 자기라는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자아를 없애야 하는 것이잖아. 나는 그 길로 남편의 어머니께 문자를 보냈다.
‘근데 불교에서 나, 자아라는 것 자체가 없어질 때를 해탈이라고 하잖아요. 나를 없애버리고 싶을 때 = 해탈하고 싶을 때도 됩니다.’
어머니: ‘아닙니다. 해탈은 죽음도 맞지만 뜻은 전혀 아닙니다.’
‘붓다의 답변: 아난다여, 비구는 느낌을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으며, 자아는 느껴지지 않는다고 관찰하지 않으며, 자아는 느낌을 성질을 가졌기 때문에 느낀다고도 관찰하지 않는다. 그는 이와 같이 관찰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서 어떤 것도 착취하지 않는다. 착취하지 않으면 갈증 내지 않는다. 갈증 내지 않으면 스스로 완전히 열반에 든다.’
‘붓다는 애초부터 ‘자아’라는 것은 없다고 보기 때문에, 자아에 집착하는 것도 욕망 중의 하나다. 붓다는 나라는 관념도 이런저런 요소들의 결합과 분리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나’라는 고정 불변한 실제는 없다.’
내가 왜 그럴까? 제목이 세다거나 자학적이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욱’ 하는 마음이 일었나 보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좋은 제목이 아니라고 하니 내가 지은 제목을 변호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다고 제가 꼭 자살하겠다고 하는 건 아니고요 라고 사족을 달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에세이 책 한 권 안에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나의 어두운 면 내지는 나를 없애버리고 싶은 순간들을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숨기지 않아 놓고선, 이렇게 내가 만든 책 제목에 대해서 누군가 물음표를 띄우면 세상 사람들의 눈에 그럴듯하게 있어 보이는 이유를 가져다가 항변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온다. 그런데 결국 시간이 지나고 다시 생각해보면, 다 다른 말이지만 내 말도 맞고 당신들 말도 맞고 이렇게 보면 이렇고 저렇게 보면 저렇네요 라는 결론에 이른다.
책이 나오고 나서 독자와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그런데 많은 독자분들이 각자의 시선으로 각자의 개성으로 제목을 받아들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A님: 딱 봤을 때,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분명히 안다면 행복해진다고 해석함.
B님: 나를 나로 받아들일 때의 기적으로 받아들였어요.
C님: 내가 한 일이 너무 부끄러워서 숨고 싶은 것 같았어요.
나는 많은 출판사에 출간 제안서를 돌렸고 긍정적인 답변을 보내온 출판사에는 이런 전제조건을 달아서 답장을 보냈다.
‘제목은 제가 지은 대로 그대로 두시오.’
지금 생각해보면 과연 그래야만 했을까 싶다. 내 책의 정체성을 더 잘 드러내 주는 카피, 단 한 마디로 이 책의 목덜미를 단숨에 움켜쥐고 흔들어버리는 그런 제목을 출판사가 지어줬을지도 모를 일이다. 모든 글이 나를 없애버리고 싶은 그런 상황만 다음 것은 아니다. 아주 엉뚱하고 사사로운 사색도 담겨 있다. 그렇다면 내 책 이름이 ‘내가 과연 왜 그럴까?’ 정도로 지었으면 어떨까도 생각해본다. 웨일 북 출판사에서 김슬기 작가의 [아이가 잠들면 서재로 숨었다]라는 책을 펴냈다. 처음 김슬기 작가가 출간 제안서를 낼 때 지었던 책의 가제는 [다시, 우아해지는 시간]이었다. 김슬기 작가도 책이 나오고 나서, 본래 자기가 붙였던 제목은 뭔가 감성적인 느낌은 있지만 책의 주제가 잘 드러나지 않고 모호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출판사에서 지어준 제목은 듣자마자 한 장면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그려진다. 정말이지 육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한 여자. 홀로 있을 수 있는 잠깐의 시간이라도 나면 급박하게 서재로 뛰어가서 책 한 권을 책장에서 꺼내서 어딘가 엉덩이만 살짝 기댄 채 무서울 정도로 책 속으로 빠르게 빠져든다. 그곳은 그녀가 유일하게 쉴 수 있고, 유일하게 몰입할 수 있는 안식처다.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을 다독이고 다시 삶의 에너지를 채우고 제 발로 다시 일상 속으로 걸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