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감각 지도
감각은
어둠 속에서 침잠하고, 웅크리고, 숨어 있다.
그림자 안에서 조용히 자신을 드러내고,
침묵 속에서 홀로 각성하며,
빛 속에서 찬란하게 피어난다.
어느 날, 문득
공간 속, 이름 없는 재료들이
감각의 문을 열고 들어온다.
빛 | 어둠 | 그림자 | 색 | 소리 | 바람 | 물
그들의 '실제' 모습을 아는 이는 없다.
형태를 고정할 수 없는, 무형의 재료들.
그래서 어떤 공간, 그릇, 틀에 담기느냐에 따라
그들은 천 가지 얼굴로 모습을 바꾼다.
빛은 우리도 모르는 틈을 적나라하게, 어김없이 드러낸다.
방문과 문틀 사이로 가느다란 빛의 프레임이 멈추지 않고 새어 나온다.
눈에 보이지 않던 틈조차 찾아내어, 그것을 올곧게 비춘다.
문 너머, 빛으로 가득한 방 안의 세계가 그려지는 듯하다.
빛은 계절의 궤적과 하루 동안의 루틴을 따라 충실히 제 길을 걷는다.
잠시 창을 통과해 방 안에 머물다, 사라질 뿐이다.
집을 위해 빛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집이 빛을 포착해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세상은 빛이라는 재료로 쓰였다.
빛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나무들처럼 자연스레 빛에 이끌려 그곳을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빛이 주는 소소한 경험은, 언제나 우리 안에 깊은 파장을 일으킨다.
결코 소소하지 않은 ‘빛’이라는 재료가 불러오는 충만함.
그 빛의 궤적을 따라가 본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의 입사각이
가장 낮은 각도로 방의 깊은 안쪽까지 파고든다.
그 지점이 바로, 동지.
반환점을 돌며, 그 후
빛은 서서히 창가 쪽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한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있다는 신호다.
빛이 들어오는 길목을 따라
몸을 조금씩 옮기며, 봄의 햇살을 따라간다.
그리고 마침내,
사라지는 빛의 뒷모습을 본다.
붉게 물들어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다시 내일의 빛을 기대한다.
# 조계사 | 회화나무 아래, 어느 해 사월 초파일
회화나무 아래에 서서, 위가 아닌 아래를 내려다본다.
연등의 빛, 그림자, 바람, 소리의 협주가
땅 위에 드리워지고, 공기 중에 흩어진다.
자연이 만들어낸 콰르텟이 울린다.
빛 조각들이 움직인다.
연등의 그림자가 움직인다.
연등이라는 실체의 그림자는
바닥에 닿으며 ‘여백’이 되고,
연등 사이의 여백은
바닥에 닿으며, 반짝이는 '빛 조각'이 된다.
빛과 그림자.
존재와 여백.
모두 동전의 양면 같다.
# 카페 | 오후의 스크린, 대나무 그림자
해가 서쪽으로 점점 기울어가며,
카페 창으로 눈부신 햇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카페 점원이 창가를 돌며 롤스크린을 하나씩 내린다.
롤스크린의 반투명한 스킨 너머,
대나무 잎들이 그림자놀이하듯 몸을 흔든다.
대나무 뒤에서 들어온 빛은
실물보다 더 큰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마치
빛과 그림자, 바람이 함께 만든 하나의 퍼포먼스 같다.
롤스크린이라는 '스킨'을 통과해
블러 처리된 듯한 장면은
오히려 더 회화적인 인상으로 남는다.
# 광장 옆 공터 | 나무 그림자가 만든 '쉼'의 장소
미사가 끝난 성당 앞 광장(Piazza).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일주일 동안의 안부를 나눈다.
광장은 광장으로서의 일을 하고 있다.
먼저 집을 향해 나선 사람들의 자동차 행렬이
광장 가장자리를 따라 이어진다.
조금 소란스러운 분위기.
그때, 여름의 강한 햇살이
광장 위로 쏟아지기 시작한다.
몇몇 사람들이 자연스레 모퉁이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곳엔 길과 광장이 만나는
조각난 장소가 있다.
나무 세 그루가
장소 전체를 기둥과 지붕처럼 덮어
하나의 파빌리온을 이루고 있다.
나무 그림자는
길과 그 너머 건물의 파사드에까지 길게 드리운다.
그늘과 바람, 햇빛 조각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이 '나무 파빌리온' 속에서
성당 앞 광장에서는 느낄 수 없던 편안함이 생긴다.
사람들의 표정이 한결 여유로워지고,
누군가는 잠시 끊어졌던 대화를
다시 이어 붙인다.
눈을 감으면 따뜻하고 밝은 빛이 눈꺼풀이라는 반투명한 피부(skin)를 통과해 들어온다.
빛이 내게 가장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곳은 눈꺼풀 너머의 눈동자, 그리고 시신경을 통해 뇌까지.
그렇게 우리는 ‘본다’는 행위를 인식하게 된다.
눈은 늘 ‘본다’는 선택지만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보지 않는다’는 선택도 존재한다.
때로는 ‘얼마나 볼 것인가’를 스스로 조절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쉬고 싶다’, ‘자고 싶다’, ‘햇빛을 피하고 싶다’, ‘부은 눈을 보이고 싶지 않다’.
우리는 눈을 뜨고 감는 행위를 통해 빛을 받아들이거나 차단한다.
인식조차 없이 자연스럽게 눈을 깜빡이며, 받아들이고 가림을 반복한다.
이미 우리에겐 아주 섬세한 조절 능력이 내재되어 있다.
더욱 정밀하게 조절하기 위해 ‘더블 스킨(double skin)’을 활용하기도 한다.
낮에는 선글라스를, 밤에는 수면안대를 사용해 빛을 거른다.
모든 순간에 빛을 필요로 하거나 반기지만은 않는다.
빛이라고 해서 언제나 좋은 것으로만 여기는 것도 일종의 편견이다.
사람은 때로 빛보다 '빛없음'- 어둠을 더 좋아한다.
그러니까, 어둠 역시 필요하다.
어둠 속에는 디테일, 사물들, 생각들, 온갖 잡다한 것들이 비밀스럽게 감춰져 있다.
어둠은 미스터리 하다. 은밀하고, 사소하고, 때로는 공포스럽고 놀라운 것들이 담긴 오래된 창고 같다.
어둠은 빛이 거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때의 ‘거의 없음’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있다는 뜻이다.
어둠 속에서 빛이 점에서 시작해 점점 커지면, 눈은 어둠에 익숙해지고, 빛은 점점 더 또렷하게 인식된다.
빛과 어둠은 서로에 의해 인식되고, 존재 가치가 생겨나는 상대적인 관계다.
그러니 어느 것도 뒤처짐 없이, 모두 찬란하게 밝고, 깊게 어둡다.
가끔 더위를 피해 성당 안으로 들어갈 때가 있다.
바깥의 밝은 세계와는 무관하게, 어둠 속 작은 촛불들이 조용히 타오르는 모습.
어둠 속에서 빛나는 촛불.
그 대비는, 설명할 수 없는 성스러움을 마음 깊숙이 불러일으킨다.
# 어둠 속에서 집중하다
나에게는 어둠을 선호한다는 몇 가지 확실한 징후들이 있다.
이를테면, 환한 공간보다 약간 어두운 곳에서 스탠드를 켜고 글을 쓰거나 드로잉을 하는 것이 작업하기에 편하다. 빛의 농도를 낮추는 그 환경에서 집중이 잘 된다.
오후 3시, 창으로 들어오는 빛의 밝기를 조절하고 책상 위 스탠드 하나를 켠다.
오후 5시, 구름으로 덮인 하늘이 방 안을 어둡게 한다. 블라인드를 올리고, 키가 큰 스탠드 하나를 켠다.
저녁 8시, 바깥은 이미 어둠에 잠식되어 있고, 협탁의 작은 조명을 더한다.
빛은 점점 작고 부드러워지고, 어둠은 점점 짙어진다.
서로에게 맞추듯 어우러진다.
# 어둠 속에서 빛나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재료와 존재들도 있다.
반딧불, 해파리, 번개, 자개, 금.
가만히 숨죽이고 바라보면, 스스로 뿜어내는 빛이 어둠 속에서 서서히 존재를 드러낸다.
최소한의 조명으로 연출한 공간에서, 자개로 만든 작품을 전시한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장면은 어떤 화려한 조명보다도 더 집중하게 만들었다.
어둠도 빛에 의해 인상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농밀한 어둠 속에서, 빛이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렇게 어디서든, 빛과 어둠은 서로를 돋보이게 하며, 환상의 콜라보를 이룬다.
그림자는 빛이 머문 자리에 생기는 또 다른 풍경이다.
언제나 뒤따라오지만, 단 한 번도 같은 모습을 한 적이 없는 그림자.
그 모양을 좇으며 나는, 그림자 탐험을 시작한다.
# 빛과 함께 걷는 존재
오후 2시. 햇살이 벽에 조용히 가 닿는다.
그 빛 뒤로 그림자가 미끄러지듯 따라붙는다.
햇빛 아래를 걷다 문득, 내 그림자를 바라본다.
그림자는 발뒤꿈치 끝에서 시작해 바닥 위로 길게 드리워지다가,
바닥과 벽이 만나는 모서리를 넘어 벽을 타고 올라간다.
마침내 도착한 그림자의 가장 꼭대기.
내 얼굴을 복제한 듯 길게 늘어진 모습은 나를 따라 움직이며, 나를 흉내 낸다.
손을 흔들고 어깨를 들썩이면, 약간 왜곡된 모습으로 응답한다.
그림자는 나인가,
나를 복제한 또 하나의 존재, 클론인가,
아니면 그저 빛이 머물지 못한 어둠의 잔재일 뿐인가.
# 타인의 그림자, 나의 그림자
밖으로 나와 길을 걷는다.
나는 종종, 사람들의 그림자를 관찰하곤 한다.
타인의 그림자는 잘 보이는데
정작 내 그림자는 어렵게 느껴진다.
그림자는 짧아졌다가 길어지고,
바닥과 벽을 따라 접히고 구불거린다.
희미해졌다가도, 어느 순간 뚜렷한 윤곽을 드러낸다.
푸른빛, 붉은빛, 주홍빛, 분홍빛.
온갖 색조와 톤을 띤 그림자들이 바닥에 스며든다.
계절, 날씨, 시간, 공간에 따라
그림자는 그렇게 모두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모습은 그림자의 주인을 따르지만,
그 바탕은 주변을 따른다.
# 그림자의 조건
그림자가 생기기 위해선 조건이 필요하다.
건축 3D 프로그램을 조금이라도 다뤄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형태를 아무리 정교하게 입체로 만들어도,
가상의 바닥이 없으면 그림자는 생기지 않는다.
현실에서의 그림자도 바닥이나 벽처럼 드리울 수 있는 ‘면’이 있어야 만들어진다.
우리는 그것들이 늘 거기에 있기에, 오히려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하지만 공중에 떠 있는 풍선이나 날아가는 새처럼,
높이 떠 있는 존재도 저 멀리 바닥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결국, 빛이 있으면 그림자는 생길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셈이다.
그리고 바닥에 닿을 때까지, 벽에 닿을 때까지,
끈질기게 주인을 따라다닌다.
마치 참을성 있고, 원칙주의적이며,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주의처럼.
# 나의 그림자
나는 늘 그 자리에 그림자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떤 날은 문득, 혼자 있을 때 그림자를 찾아보게 된다.
그 존재를 확인하고 나면, 이상하게도 안심이 된다.
그래서 오늘의 그림자는 바로 이렇다.
나를 조용히 지탱해 주는 그림자가,
유난히도 진하고 길게 바닥에 드리워져 있다.
# 공간의 뉘앙스를 만드는 그림자
그림자라는 재료는 건물과 공간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그림자가 빠진 입면도나 투시도를 본 적이 있다면 알 것이다.
그림자가 없는 건물은 평면적이고, 깊이감 없이 가벼워 보인다.
그림자는 건물의 굴곡, 요철, 형태를 드러내며
입체임을 증명해 준다.
그림자가 없는 세계는,
형태와 조형에 디테일과 뉘앙스를 지운 세계와도 같다.
하루 동안 해가 뜨고 지는 동안,
건물 위에 빛이 비추는 만큼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장소와 건물 위로,
빛과 그림자, 그리고 시간의 궤적이 통과해 간다.
빛이 남긴 서사.
그림자는 말없이,
여기, 내 뒤에 있다.
눈앞에 보이는 핑크색 벽이 뜻밖에 마음에 와닿을 때가 있다.
핑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런 당황스러움조차 받아들이기로 한다.
‘익숙하지 않은 색인데도, 왜일까. 자꾸 눈길이 간다' 문득 떠오르는 마음의 소리.
하지만 그 감정은, 지금 이 순간의 감각일 뿐이다.
심플하고 모노톤을 선호한다고 해서, 그것이 고정된 정답은 아니다.
벽의 색, 손 끝의 질감, 천의 주름처럼—
그 모든 것은 결국, 그 순간의 마음이 반응한 결과일 뿐이다.
컬러의 세계는 오랫동안 우리를 고정관념 속에 머물게 했다.
지금껏 경험해 본 색의 세계가 얼마나 한정적이고 작은 지를 실감해 볼 필요가 있다.
'빨강'이라는 범주 안에서 빨강의 종류를 세는 일은 무의미할 만큼 많다.
72색 색연필 케이스를 열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빨강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150색쯤 되면, 경계도, 구분도 점점 무의미해진다.
그러니 이제 깨달아도 좋다.
색에 대한 관념을 계속 가져도 되고, 버려도 된다.
'금기'가 그것과 상관없는 사람에게는 '금기'가 아니듯,
그 자체에 매이지 않는다면 색에도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
색연필에 쓰여있는 ‘Rose Carmine’ 같은 이름은,
그저 만든 이와 쓰는 이 사이의 암묵적 약속일 뿐이다.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의미 없는 구분이기도 하다.
색에 대한 관념은 가져도 되고, 버려도 된다.
적어도 일상에서, 색에 정답이란 없다.
“색이란 재료, 형태에서는 감성이요, 원시 상태에서는 물질이다.”
_ Yves Klein
색은 하나의 얇은 스킨, 즉 표피다.
어디에, 어떻게 입혀졌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인식된다.
스킨의 텍스쳐, 재료, 빛의 양과 각도, 세기에 따라 눈은 다르게 반응한다.
자연에서 추출된 색은 인공적으로 만든 색과는 뉘앙스가 전혀 다르다.
사과의 빨강과 물감의 빨강, 나뭇잎의 초록과 색으로서의 초록은 결코 같지 않다.
모방하려 해도 따라갈 수 없는, 자연 그 자체의 색이다.
인공색이 주는 감성 역시 풍부하다.
따뜻하고, 창의적이고, 때로는 안정감을 주며, 때로는 우울하게도 만든다.
컬러라는 세계는 이미 우리의 일상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주변을 휙 둘러보면, 색의 감각이 얼마나 공간을 지배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만약 사람의 눈이 더 많은 빛을 볼 수 있었다면,
어둠은 지금보다 작거나, 혹은 더 뚜렷하게 인식되는 존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지하는 빛의 종류와 양에 따라, 풍경의 그림자와 어둠, 색이 지금처럼 보인다.
사물과 풍경의 실체는 그 너머에 존재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보이는 대로’ 받아들인다.
같은 것을 다르게 보는 차이는
자세히 보려는 태도와, 다르게 보고 싶은 마음의 동기에서 비롯된다.
관념을 잠시 내려놓고, 감각을 열어젖혀 그 세계에 집중한다.
감각을 섬세하게 갈고닦아,
이제껏 보지 못한 풍경의 너머를 본다.
색은, 기억과 감각이 스며든 가장 오래된 언어.
동시에, 우연과 자유 속에서 피어나는 가장 새로운 언어다.
모호함으로 가득한 보이지 않는 감각의 재료들.
빛, 어둠, 그림자, 색, 소리, 바람, 물—
우리의 일상에 결을 새긴다.
감각을 곱씹는 이 작은 기록들이,
도시라는 풍경 속에 당신만의 색을 더해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