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재료: 소리

일곱 번째 감각 지도

by 귀리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감각하여 저장할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순간들을 붙잡아둘 수 있을까?

눈앞에 펼쳐진 세상을 머릿속에 그대로 저장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시각적 재생을 위한 도구들, 예컨대 사진이나 드로잉의 도움을 받는다면, 어느 정도 가능해진다.

사진은 사물과 장면을 오래도록 바라보게 만들고, 드로잉은 그 위에 머물며 사유를 깊게 한다.

눈으로 본 세상이 뇌 한 모퉁이에 새겨져 있다 하더라도, 원할 때 꺼내지 못한다면 이미지에 대한 사유를 얻기란 쉽지 않다. 그에 비해 사진과 드로잉은 기록으로 남는다. 물론 그것이 왜곡되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지만. 이 기록들은 우리가 세상을 통찰할 수 있게 우리를 도와준다.

그렇다면 소리로 보는 세상은 어떨까.

눈으로 보는 세상이 가장 먼저 체감되는 감각인지, 아니면 다른 감각보다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단정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소리는 시각에 비해 언제나 ‘마이너’하게 감각으로 머다. 예컨대, 규칙적인 소음이 들리는 공간에 오래 있다가 그 소리가 사라지면 비로소 ‘소리’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소리는 들리고 있음에도, 다른 감각에 묻혀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

나는 청각이 특별히 예민한 편은 아니지만, 의식적으로 소리에 집중하는 환경을 만들어 감각하려는 사적인 습관이 있다.



소리를 감각하는 방법

음악을 감각하는 것처럼, 소리도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른 경험이 된다.

첫 번째 방법은 소리를 듣는 환경을 바꾸는 것이다.

직접 몸을 움직이며 소리에만 집중해 장소를 탐험해 보는 것이다. 어두운 방 안에서 음악의 선율과 진동에 집중하거나, 목욕탕, 대나무 숲처럼 소리가 울리는 장소에서 귀 기울여 본다.

계획된 음향 공간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주변에서 의외로 ‘소리를 선명히 품고 있는 장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공간은 때로 뜻밖의 방식으로 소리의 입자를 또렷하게 살아나게 한다.

두 번째는, 소리가 ‘설계된 공간’에서의 경험이다.

소리 그 자체가 건축 요소로 디자인된 공간, 뮤지컬이나 음악 공연장, 로마 시대의 야외극장처럼 용도에 맞춰 음향이 계획된 장소에서의 감각적 경험은 일상의 소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공연의 종류, 날씨, 시간, 연주자의 의도에 맞게 조율된 환경 속에서 우리는 같은 소리를 다른 방식으로 듣게 된다. 공연장의 소리는 감각의 결을 바꿔놓는다.


절규하는 배우의 대사에 감동을 받는다.
첼로의 낮은 떨림에 몸이 부르르 떨린다.
발레리나들이 바닥을 딛는 소리와 진동이 온몸에 전해진다.


그 소리는 몸과 감정을 동시에 흔든다.


어떤 소리는 벽에 부딪혀 반사되고, 또 어떤 소리는 벽에 흡수되어 사라진다.

나는 소리에 대한 상상을 한다. 만약 완벽하게 밀폐되고 반사율이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있다면, 그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끊임없이 반복되는 반사음이 공간을 떠돌다가 언제쯤 사라질지 기다리게 되진 않을까 호기심이 생긴다.

그런 상상과 질문들이, 소리에 대한 감각을 더욱 확장시킨다.

세 번째는, 소리를 기록하고 재생하는 방식이다.

가끔 소리를 기록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땐 핸드폰을 꺼내, 음악이 아닌 일상의 소리와 장소의 분위기를 녹음해 둔다. 장면 한 조각처럼, 소리 한 조각에 대한 기록이다.

마치 균형을 맞추듯, 이미지를 지우면 소리가, 소리를 지우면 이미지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한 가지 감각만 남기고 나머지를 지우면 그 하나가 가장 예민하고 강렬한 모습으로 수면 위로 떠오른다.


소리, 냄새, 빛, 바람, 공기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감각의 재료들.

이들은 공간 구석구석에서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고, 감성을 일깨운다. 느끼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더 큰 감각의 세계를 열 수 있다. 그리고 소리는 ‘기록하고 재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빛이나 바람보다 훨씬 더 가까운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띠링 띠링
구구 구구구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천천히 돌린다. 소리가 시작된 근원을 확인하는 그 짧은 순간에도 우리는 이미 소리의 실체를 상상하고 있다. 녹음된 소리를 다시 들으며 그 장소의 분위기를 가늠해 보거나, 새로운 공연장에 가서 소리의 미묘한 차이를 감각해 볼 수도 있다.

그렇게 소리에 대한 감각을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듯 마주한다면, 그동안 들리지 않던 소리의 세계가 문을 열고 우리 앞에 펼쳐질지도 모른다.

소리를 수집하기 위해 거리로 나선다.



소리의 기록들

소리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공사장의 규칙적인 기계음이 울리고, 빗길 위로 차 바퀴가 ‘슥슥’ 미끄러진다.
봄을 닮은 새들의 지저귐이 '짹짹' 귀를 간지럽히고, 자전거 바퀴는 '달그락' 소리를 내며 옆을 스쳐 지나간다.

도서관 마감 10분 전, '사각사각', '저벅저벅' 사람들의 움직임이 공간에 긴장감을 더한다.

처마 끝에서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리듬을 만들고, 여행지에서 만난 파도 소리는 마음을 흔든다.

'부우웅' 실외기가 느리게 돌아가는 소리는, 아무 일 없는 오후의 배경처럼 잔잔히 깔다.

버스 엔진이 부드럽게 웅웅거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선거 유세의 목소리가 거리의 공기를 자극한다.
‘땡, 땡, 땡…’ 성당 종소리가 6시 정각을 알리고, ‘텅’ 택시 문이 닫히는 소리는 한 장면의 끝을 알린다.

물 흐르는 소리는 잔잔하게 공간을 채우고, '또각또각' 하이힐 굽 소리는 거리를 가로지르며 이야기의 발자취가 된다.
'지글지글' 요리하는 소리는 따뜻함을, 누군가 부르는 소리는 간절함을 품고 있다.

'와아아' 왁자지껄한 아이들 소리는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고, 신호등 알림음은 멈춰있던 걸음을 일깨운다.
가게 TV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우우웅’ 청소차 지나가는 소리까지.

이 모든 소리들이 차곡차곡 쌓이며 우리의 일상을 채운다.

그렇게 쌓인 소리의 기록들은, 장소와 시간의 감각을 함께 붙잡아 둔다.

그리고 그것들이 다시 재생되는 순간,

우리는 그때 그곳의 공기와 날씨, 분위기 속으로 조용 스며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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