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쳐진 시간의 풍경

아홉 번째 감각 지도

by 귀리


겹겹이 쌓인 걸음

아주 오래전 스쳐간 발자국 위로,

누군가의 발자국이,

그 위로 다시 또 다른 발자국이

겹겹이 쌓여간다.

걸음은 멈추지 않고 이어진다.

뚜벅뚜벅. 또각또각. 자박자박. 뽀드득뽀드득. 쿵쿵.

한 장소에 쌓인, 경험된, 일어난 무수한 편린들.

그 자리를 스쳐간 사람들의 자취가 기록된다. 새겨진다.

발자국은 많은 것을 드러낸다.

걸음걸이의 습관, 발 사이즈, 체격, 신발의 종류 같은 지극히 사적인 정보부터,

함께 걷는 사람과의 거리, 걸음의 리듬 같은 관계의 단서들까지.

물론 오랜 시간 동안 켜켜이 쌓인 발자국들이

실제로 눈에 보일 리는 없다.

하지만 분명, 장소 어딘가에 남아 있다.

마치 지문을 채취하듯

형광 가루를 뿌리고 특수한 빛을 비추면

어둠 속에서 그 흔적들이 서서히, 또렷하게 드러날 것만 같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모든 길은 사람들의 흔적을 오롯이 기록한 연대기를 품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지금 내가 내딛는 이 발걸음이

'그들'과 함께 걷는 것처럼 느껴진다.

같은 시간은 아닐지라도,

같은 장소를 함께 걷고 있는 셈이다.



무의식이 이끄는 발걸음

# 삼청동, 어느 오르막길

처음 방문했다고 생각한 곳이,

사실은 두 번째였다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이 있다.

지도상으로는 전혀 감이 오지 않았는데,

막상 그곳에 도착하자 익숙한 감정이 밀려왔다.

까맣게 잊고 있던 장소를 다시 찾게 된 건,

우연일까. 아니면 무의식의 호출일까.

이끌림.

그것들엔 변하지 않는 본성이 있다.

길은 야트막한 오르막에 살짝 휘어져 있었다.

그 부드럽고 정겨운 곡선은 오래된 도시만이 가질 수 있는 풍경이었다.

어떤 장소의 분위기를 만드는 건, 어쩌면 이런 디테일들일지 모른다.

길의 형태, 높낮이, 곡선의 흐름.

이런 장소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도시가 아무리 변해도, 고유의 결은 남아 다시 경험할 수 있게 한다.

그 경험이 시간 위에 겹겹이 쌓여, 또 다른 감각을 남긴다.

한결같은 길 위에,

변했지만 그대로인 내가

두 번째 흔적을 남긴다.



하늘을 품은 골목

# 이탈리아 페루자 구도심의 어느 골목

시간을 들여 천천히, 건물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들을 따라가 보았네 _ Via Della Sapienza, Perugia, Italy _ BGM # Moments | FKJ


방향 감각을 잃고 헤매던 중,

우연히 닿은 장소.

보물처럼 꽁꽁 숨어 있는 공간이었다.

광장이라기엔 사적이고,

길이라기엔 비정형적인,

광장과 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이름 붙이기 어려운 장소.

중요한 건, 장소가 품고있는 분위기다.

세상은 모호한 장소의 조각들로 짜인

거대한 패치워크일지도 모른다.

사방이 건물로 둘러싸인 그 공간에서,

구름이 걷히며 하늘이 열렸다.

바닥 형태 그대로 드러난 사각형 하늘.

마치 커다란 액자 프레임에 걸린 풍경 같았다.

그곳은 매번 하늘을 올려다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시간과 계절, 날씨가 달라질 때마다

하늘은 매번 다른 그림이 되어 돌아왔다.


오래된 풍경들에 마음이 간다.

세련되고 완성된 것보다,

덧대어진 흔적과 변형된 구조가 남아있는 것들에.

입구가 바뀌고, 창문이 막히고, 용도가 전환된 흔적들.

사람이 나이 들어가듯,

건물도 시간과 함께 나이 들어간다.

처음의 아름다움을 고집하지 않고

변화에 맞춰 유연함을 보여주는 건물들.

그 너그러움이 오래된 도시만의 매력이다.

오래된 장소를 해체하고 상상하는 시간 속에서

관점이 바뀌어간다.

일상이 깃든 건축은 결국 살아 있는 구조라는 것.

그래서 완벽한 정돈보다 흔적이 많은 것이

더 진실하다는 것을

언젠가 사람들은 알게 된다.



시간의 아치를 따라 걷다

# 이슬람 모스크 중정

나는 이곳에서 아치의 역사가 영화처럼 흘러가는 것을 목격했네 _ Saudi Arabia _ BGM # Ta Douleur | Camille


어떤 한 도시의 건물은

한 시대에 완성되지 않는다.

수십, 수백 년에 걸쳐 지어지고 덧대어지며,

시간의 지층을 품는다.

이슬람 도시의 어느 모스크 중정 앞에 서 있다.

아치의 형태가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윗부분이 뾰족한 스타일의 '뾰족아치',

가장자리가 여러 개의 호로 이어진 '다엽형 아치'.

서로 다른 시대의 양식이 한 풍경 안에서 공존한다.

기능을 위해 진화한 구조,

장식을 위해 더해진 변화.

커다란 아치에 대한 욕망이 커지며,

아치의 힘을 분산시킬 수 있는 형태로 발전해왔다.

양식의 흐름은 문명의 교류를 따라 돌고 돈다.

로마에서 시작된 아치는

아프리카, 이슬람을 거쳐

다시 유럽으로 되돌아왔다.

도시의 나이테 같은 풍경이

단절됨 없이 공존하고, 켜켜이 쌓여간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

영향을 받고, 겹쳐지고, 진화하며 다시 돌아온다.

오늘 하루 내가 만든 어떤 것도,

수많은 이름 없는 이들의 감각과 삶,

말과 표정, 음식과 날씨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시간의 흔적들이 쌓이고, 충돌하고,

공존하는 도시의 풍경은 그래서 더 깊다.

도시라는 캔버스 위에,

시간의 반투명한 필름들이 켜켜이 덧입혀진다.

겹겹이 쌓인 삶의 층위는,

늘 완성되지 않은 이야기처럼 우리 앞에 펼쳐진다.



감각의 속도, 시간과 장소

물리적 조건을 만족시켜 만든 장소에서

디자이너가 의도한 감성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느낌은 개인의 경험과 감각에 따라 다르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통의 감각이라는 것도 분명 존재한다.

장소는 때로는 지극히 사적이고,

때로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정서를 이끌어낸다.

누군가는 어떤 장소를 보며 데자뷔를 느끼고,

누군가는 같은 장소에서 경건함이나 평온함을 느낀다.

개인의 감각과 집단의 감성이 겹치는 지점.

거기서, 우리는 장소와 연결된다.

시간에 대한 감각은 장소와는 조금 다르다.

시간은 물리적으로 균등하게 흐르지만,

우리의 감각은 그 속도를 자유롭게 조절한다.

어떤 시간은 멈춘 듯하고,

어떤 순간은 오래전으로 되돌아간 듯 느껴진다.

메트로놈의 리듬이 이탈하거나,

시계가 거꾸로 돌거나 느리게 가는 일은 없지만,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시간이 멈춘듯한 감각은 분명 존재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심리 상태와 경험에 연관된

지극히 주관적인 감각이다.

장소에 비해 시간은 공통의 감각이 상대적으로 작다.

시간과 장소에 대한 감각을 분리해서 말했지만,

서로 방식이 다를지라도 늘 함께 맞물려 움직인다.

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로 가득한 관계 속에서, 공존한다.


나는 때때로,

도시의 시간이 장소에 스며든 풍경 앞에 멈춰 선다.

그럴 때면, 여러 겹의 감정이 나를 통과한다.

그립고, 즐겁고,

감각을 깨우고,

오롯이 '홀로'임을 느끼고,

'누군가와 함께'임을 떠올린다.

그런 감각들이 우리의 걸음을 이끈다.

다음 장소로, 다음 순간으로.

상상과 기억의 문이 조용히 열린다.

그 곳엔 시간이 뽀얀 먼지처럼 내려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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