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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 Oct 27. 2020

가장자리가 시작되다

가장자리를 탐험하다-1

“가장자리에서는 중심에서 볼 수 없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꿈에도 생각 못한 큰 것들을, 가장자리에 선 사람들이 맨 처음 발견한다” _Kurt Vonnegut Jr.



모든 사물의, 장소의 가장자리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가장자리는 선이 아닌 하나의 범위를 의미한다. 현실 세계에서의 경계는 칼로 자른 듯 명확하지 않고 모호하며, 주위를 감싸는 둘레(boundary)이면서 사이(space in between)이기도 하다. 작게는 1mm의 틈에서부터, 크게는 DMZ처럼 4km의 존을 이루며 비어있다. 그래서 가장자리의 이야기 속에 가장자리 주변은 조연이 아닌 주연에 가깝다.

그곳은 적막하기도 하고, 복잡하고 혼란스럽기도 하며, 아슬아슬한 텐션이 흐르기도 하며, 느슨하게 헐거워져 있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가장자리는
자기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갖고 존재한다.


중심과 가장자리는 서로에게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단번에 뒤집히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의 운명은 변화무쌍하다. 원래부터 가장자리의 운명을 타고난 것들, 가장자리로 밀려난 것들, 중심이 가장자리로 바뀐 것들. 그들은 숨을 참고 앞 다퉈 이야기하려고 하는 수다쟁이들처럼 여기저기 도처에서 특별한 가장자리임을 주장해댄다.

가장자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이 다이나믹한 경계의 아우라를 따라가 보기로 한다.



#1. 말라가 외곽의 어느 모퉁이

Calle Suspiros, Alora, Malaga, Spain _ BGM # Go To Sleep | Bearson

땅의 높이차가  도시에서는 경사를 따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차이와 경계가 눈으로 보이는 장소들도 있다. 레벨은 하나의 기준에 대한 상대적인 평가이다. 그래서 낮고 높은 서로에 대해 가장자리를 이룬다. 우리는 바로 그곳 경계에서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 낯섦, 독특한 경험들을 하게 된다.

우리는 스페인 말라가의 어느 모퉁이에 있다.

길 건너 모퉁이를 따라 시선을 이동해 담 주변을 바라본다. 담과 자연스럽게 연결된 낮은 턱, 계단, 벽. 모두 한 덩어리로 이어진 채로 집의 가장자리를 이루고 있다. 다시 시선을 길 쪽으로 살짝 돌려보면 도로의 가장자리에는 보도와 담이 있다. 말하자면 담은 집과 도로에 대해 모두 가장자리를 차지하면서도 동시에 그 중심에 놓여 있기도 하다.

중심이 있으면 가장자리가 있고, 기준의 대상에 따라 중심과 가장자리는 바뀌기 마련이다.

세상은 그렇게 모두 상대적인 것임을.



#2. 론다의 어느 담벼락

Calle Cuesta De Santo Domingo, Ronda, Malaga, Spain _ BGM # Dancing With Your Ghost | Sasha Sloan


담은 집의 가장자리다.

담은 길의 가장자리다.

담은 집과 길의 경계에 놓인 두께가 있는 선이다.

담은 태생이 닫힘에서 비롯됐지만, 열린 부분에 의해 존재의 의미가 생긴다.


Calle Cuesta De Santo Domingo, Ronda, Malaga, Spain _ BGM # Smiling When I Die | Sasha Sloan

스페인 론다의 어느 담벼락에 우리는 있다.

경사지의 길을 따라 리드미컬하게 담이 흘러간다.

이쪽과 저쪽, 집의 안과 밖을 경계 짓고 통하게 하는 중재자로서의 담이 길을 따라 이어져있다. 집의 바운더리를 벗어나며 담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하기 시작한다. 그 자리에 꼭 필요한 모습으로.

벽에서 파생된 담이 집으로 통하는 문이 되고, 계단 옆 파라펫이 되고, 전망을 열고 닫는 픽쳐 프레임(Picture Frame)이 되기도 한다.

무엇을 위한 공간인지 모르는, 명확하지 않은 쓸모를 지닌, 담 주변의 모든 것들은 서로 관계를 주고받으며 담은 공간으로서 확장되어 간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가장자리인 담은 단단하고 닫혀있는 듯 하지만, 유연하고 열린 모습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려온다.



#3. 도로의 가장자리

고속도로에서 나와 국도로 들어서는 순간, 풍경은 변하기 시작한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의 지형은 국도의 모습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터널이 있는 곳이 아니라면 길은 지형을 따라 굽이 굽이 곡선을 그리며 나아간다. 차를 타고 달릴 때 우리가 바라보는 풍경이 어디서 본듯한 비슷한 모습으로 점점 바뀌어가고 있지만 아직도 세상의 많은 도로의 풍경은 다이나믹하고 다양하다.

도로의 가장자리는 그런 면에서 도로의 풍경을 결정하는 중요한 디테일 중 하나이다.

주변의 언덕, 바위, 담, 집, 길, 강, 바다...... 만나는 모든 것들과의 경계에 도로의 가장자리, 파라펫이 있다. 추락 위험 구간에 설치하는 안전시설물인 파라펫은 가드레일처럼 프로토타입화 되지 않은 포괄적인 용어로 디자인이 가능한 영역에 속한다.

Camino De La Estacion, Alora, Malaga, Spain _ BGM # Ready Yet | Sasha Sloan


여기 말라가 외곽의 어느 도로가 있다.

도로의 한쪽 편은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건물들에 맞춰 파라펫, 담, 벽으로 가장자리를 따라 모스부호처럼 연결과 끊김의 반복으로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다른 한 편으로는 바위와 자연을 배경으로 자연스러운 곡선으로 윤곽을 이어가는 파라펫이 한눈에 인지된다. 산 능선을 휘감아 돌아가는 도로의 동적인 움직임이 가장자리를 따라 오르락내리락 지형에 맞춰 춤을 추는 파라펫으로 더 강력한 제스처를 드러낸다. 만약 이곳에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가드레일이 있었다면 이 풍경은 눈을 사로잡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건물의 창을 통해 바라보는 고정된 풍경과 자동차의 창을 통해 바라보는 움직이는 풍경은 우리에게 다른 방식의 사유를 가능하게 해 준다.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스쳐 지나는 풍경 속에서 생각과 감성의 변화를 체감하게 된다.

차 창을 스치는 끝없는 풍경 속에 한 번쯤 뒤돌아보게 만드는 도로와 도로의 가장자리를 발견하게 되기를 기대하게 된다.




접히고 꺾이고 끝이 나는 모든 곳에 가장자리가 있다. 한 나라의 끝에는 국경이 있고, 마을의 끝에는 성곽, 수호신, 성모상이 자리하고, 집의 끝에는 담이 있다.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는 가장자리의 존재감이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듯하다. 무엇을 바라보는지 보다 바라보는 위치와 방향에 집중하며, 그렇게 늘 가장자리에 서서 경계의 안팎을 바라본다.

그러고 보면 개인적인 기준에서 흥미롭다 싶은 것들의 공통점이 늘 마이너 하다는 것이다. 세상의 마이너 한 것에 관심이 가는 개인적인 성향에서 시작된 장소 탐험이 이미 나의 세계에 주류가 되었다. 가장자리를 탐험하면서 이런 생각을 할 만큼 마이너 한 특성이 나와 닮았다.


중심보다는 가장자리에, 위보다는 아래에,
고정된 것보다는 움직이는 것에
마음이 꿈틀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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