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귀리 Oct 29. 2020

광장, 우리에게 손짓하다

중심을 탐험하다-4

광장을 만드는 것은 ‘ 공간 디자인하는 작업이다.

어떤 행위와 이벤트가 일어날 수 있도록 가능성을 담는 빈 그릇이다. 아무 목적 없이 그냥 비워둔 형식적인 공간이 아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비어있는 방’이다.

그곳에 앉고 싶고, 쉬고 싶고, 뭔가가 일어나기를 기대할  있는  여백이다. 그래서 아무리 계획한 방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의도된 장소인지와 상관없이 사람들이 쓸모를 결정할 때가 종종 있다. 특히 건축가도 발견하지 못한 장소의 잠재력을 아이들은 ‘놀이 통해 끊임없이 끌어올리곤 한다. 그런 예측 가능하고 그렇지 않은 모든 것들을 품을  있는 광장 속으로 들어가 본다.



#7. 광장에 맞는 이벤트, 이벤트에 맞는 광장

Plaza Espana, Romangordo, Spain _ BGM # Vibin’Out | FKJ & O

이곳은 스페인의 아주 작은 도시 로만 고르도의 광장이다.

원 4분의 1조각에 가까운 독특한 형태의 플라자 에스파냐는 로만 고르도(Romangordo) 유일의 광장이다. 도시형성과정에서 광장으로 계획되었다기보다는 이미 형성된 불규칙한 가로 체계에 맞춰 만들어져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이형의 모습을 띠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경사에 의해 반쯤 땅에 묻히고 낮은 건물들에 촘촘히 둘러싸인 부채꼴 광장은 물리적 형태가 장소의 성격을 결정짓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작은 마을의 축제와 이벤트가 광장의 형태에 맞춰 계획되고 이루어진다.

이벤트를 기획함에 있어서 출발점은 장소에 대한 이해다. 모든 것이 가능한 광장이 가장 이상적일 수 있지만 때로는 반대의 상황이 예상치 못한 경험으로 이끌어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세계 곳곳에서 우리는 깨닫게 된다.

시에나(Siena)의 캄포 광장은 팔리오(Palio)라는 말 경주를 위해 부채꼴의 경사로 처음부터 만들어진 계획된 광장인데 일 년에 한 번 개최되는 축제를 제외하고 평범한 일상의 모습이 오히려 더 흥미롭다.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은 그 경사에 누워 광합성을 하거나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눕듯이 앉아 시간을 보낸다. 비슷한 경사도를 지닌 퐁피두 광장은 관광객을 타깃으로 하는 마술공연과 같은 이벤트들이 광장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사람들은 눕거나 앉아서 공연을 보고 잡담을 한다.

땅의 굴곡, 기복을 없애고 도시의 바닥을 심플하게 정리하고자 하는 수평에 대한 강박은 도시를 평평한 세계로 바꿔놓는다. 그래서 평평함 속에서 비스듬함은 익숙함 속의 낯섦이고, 그 경사의 낯선 각도가 사람들의 행위를 이끌어낸다. 이벤트를 만드는 사람과 즐기는 사람 모두 그들 나름대로 장소에 적응하며 계획하고 행동한다. 사람이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적인 기대를 하게 되는 지점이다.



#8. '작은' 스케일의 광장이 우리에게 손짓한다.

Plazuela Del Socorro, Caceres, Spain _ BGM # The Choice | Gustavo Santaolalla

이곳은 중세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스페인 카세레스(Caceres) 구도심의 어느 벽 모서리다.

사라져 간 순간을 박제해 놓은 것처럼 담담히 서 있는 로마의 성벽이 이곳에 있다. 성벽의 바깥을 따라 낮은 벽을 세우고 작은 광장을 감싸 안으며 로마 성벽을 기억하는 장소로 만들어낸 것이다.

경사지에 놓인 광장은 몇 개의 스텝으로 이루어져 있고, 가장 높은 스텝에 있는 로마 성벽을 자연스럽게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하고 있다. 그리고 이 광장의 배경을 자처하는 건물 측벽의 존재감이 장소를 더 극적으로 연출하게 한다.

이 장소를 분류하는 ‘plazuela’라는 단어가 장소의 분위기를 암시한다. 플라자(Plaza) 보다 작은 플라주엘라(Plazuela), 플라스(Place) 보다 작은 플라세트(Placette). 장소를 나타내는 단어 뒤에 '작은'이라는 어미가 붙어 '우리가 아는 그 장소보다 조금 작은'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실제 답사를 다녀보면 그 기준은 너무 모호해서 여기가 왜 광장인가 하는 곳이 많이 있지만, 이런 '작은'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는 장소들은 그럴만하다는 납득이 간다. 아늑하고 단순하다.

광장의 스케일이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와 잠깐 머물러 가라고 손짓하는 듯 사람들을 받아들인다.


정오의 햇살이 나무 사이로 스며들어 광장 바닥에 빛과 그림자의 카모플라쥬 문양을 드러낸다. 바람이 불면 움직이는 광장의 문양 사이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일요일 오후의 더할 나위 없는 시간이 이곳 광장에서 흐를 참이다. 느리게, 느리게 흘러가라.




유럽의 도시들은 '광장'과 '광장 같은' 장소들이 너무 많아 진작부터 기준이 없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곤 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기준이라는 틀이 있었다면 자유롭게 다양화되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도 든다. 분류나 이름, 기준이 없었더라면 세상은 혼란스러웠을 테지만 그런 규정된 것들이 침투하지 못한 느슨하지만 단단한 틈의 불규칙한 세계가 우리에게 자꾸만 손짓한다.

이런 참에 한 숨 쉬었다 가라고.

이전 04화 광장의 가치가 달라지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