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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 Oct 22. 2020

도시탐험의 시작


광장, 공원, 스퀘어, 골목, 계단.

장소를 나타내는 이름이 그 장소의 성격을 모두 표현할 수는 없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 이름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은 그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는데 어려움에 부딪힐 것이다.

세상의 모든 분류에는 모호함과 한계가 있다. 모든 걸 분류해 이해하기 쉽게 만드는 것에도 가치가 있지만, 분류하지 않아도 그 본질에 접근할 방법이 있기 마련이다.


그 각각의 어느 모퉁이 | 어느 계단 | 광장과 길이 만나는 곳 | 담과 집이 만나는 모서리 | 길과 건물이 만나는 모서리의 턱 | 경사진 땅과 계단이 만나는 곳 | 계단과 계단을 연결하는 참


같은 나무, 같은 바위, 같은 숲이 없는 것처럼 같은 광장, 길, 모퉁이도 없다.

한 단어, 한 문장으로 묘사하기에 장소에 대한 표현력은 부족하기만 하다.

건축이나 도시를 이야기하는 방식이 전문성의 테두리 안에 갇혀 확장의 시도에 무관심하다는 사실을 예감한 지는 오래다. 전문성을 벗어던진 날 것의 가능성들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전문성에서 벗어나 일반화를 하는 과정 속에서, 도시와 건축에서 작동하는 가치들이 다른 모든 분야에 공통적으로 통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단어나 문장의 중의적인 의미 속에 그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눈에 보이는 것의 뒷면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생각의 반대를 들여다보고, 보지 못한 세상의 이면을 보고자 한다.

이제 더 이상 내게 광장은, 길은, 벽은, 운하는, 모퉁이는 그것 자체이지 않다.


떠나온 자리, 이야기의 시작점을 돌아본다.

유형별로 나눠 장소에 대한 글을 쓰는 과정은 왠지 더디고 실체가 잡히지 않는 느낌의 지난한 시간이었다. 카테고리화, 일반화해서 거기에서 궁극의 무엇을 찾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같은 ‘’, ‘광장’, ‘계단이더라도 장소에 따라  각각이 품고 있는 이야기는 다르다. 그래서 ‘실제 장소 대한 글과 드로잉이라는 전환이  시간 동안의 정체를 해결해 주었다. 관념화된 장소의 종류에서 벗어나 실재하는, 경험하는, 감각으로 느끼는 장소에 대한 탐험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조르쥬 페렉(Georges Perec)의 공간의 종류(Espece d’espaces)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왜냐하면 이 책과의 만남이 장소에 대한 생각의 베이스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 곳, 만질 수 없는 곳, 실제로 비물질적인 곳, 넓이를 갖는 곳, 외부에 있는 곳, 우리 외부에 있는 곳, 우리가 이동해 가는 도중에 있는 곳, 주위 환경, 주변 공간.… 하나의 공간, 하나의 아름다운 공간, 하나의 아름다운 주변 공간, 우리를 둘러싼 하나의 아름다운 공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작은 공간 조각들이 있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 도시 속 장소들의 수많은 평범한 것들이 의미를 갖고 눈과 손으로 들어온다.


장소 하나하나에 집중하다 보면 그 도시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고, 하나의 도시를 관찰하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다른 도시와 비교하게 된다.

태어나 자란 곳_단양, 건축을 시작한 곳_서울, 일상과 건축을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된 곳_파리.

일정한 시간을 한 도시에서 살면 나름의 스케일, 밀도, 장소성과 같은 기준이 몸에 스며들 듯 만들어지게 된다.

일종의 도시에 대한 자기만의 기준 즉 DNA라고 이야기해 볼 수 있겠다.

가끔 어떤 공간에 대해 상상할 때 세 도시의 장소들이 소환된다. 일상 속에 많은 풍경들이 원래부터 그랬던 것인 양 당연하게 받아들이고는 낯선 도시에 서면 모든 당연한 기준들이 흔들리게 된다. 그래서 그 흔들림 속에 늘 세 도시가 공존한다.

‘모스크바를 알게 되기 전에 먼저 모스크바를 통해 베를린을 보는 법을 배운다.’라는 벤야민의 글처럼 한 도시를 관찰하면서 이전의 ‘나의 도시’들을 알아가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BGM # Simple Put | John Scofield


이 탐험과도 같은 과정이 오랜 시간 집중했던 가치들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여정을 시작한다.

시도하지 않으면 이 이야기는 여기에서 멈춘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장소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을 상상하며 장소를 찾고 글을 쓰고 드로잉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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