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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냐 정 Mar 05. 2024

글을 쓰지 않기로 결심하는 시간에 대하여

3주 만이다. 3주 만에 연재 브런치북의 글쓰기 버튼을 누른다. 한 달 전이던가, 인스타그램에 나는 어떤 상황에도 결국 써내는 사람이라고 쓴 적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브런치 연재글을 미루기로 결심했다. 내가 달라진 건 아니다. 다만, 그날 인스타그램의 글에 빼먹은 말이 있었을 뿐. 나는 종종 글을 쓰지 않기로 결심하는 사람이다. 글을 쓰기로 결정했다면 결국 쓰지만,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쓰지 않는다. 하하, 이게 무슨 말장난인가. 그렇다면 나는 어떤 상황에도 쓴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맞는가. 나도 헷갈리기 시작한다.


작년 가을, 석촌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도넛가게에서 비슷한 고민을 했었다. 남편이 회사 행사 때문에 잠실에 간다길래 따라나선 길이었다. 오가기 좀 더 편하겠다는 생각이 어딘가 나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쉽게 나서지 못한 마음에 동기부여가 되었다. 무얼 할까 하다가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잠시 호수뷰를 즐기다가 미술관에 갈 생각이었다. 잠시 거기 앉아서 평소에 보는 것과는 다른 풍경을, 공기를, 그저 조용히 담고 싶었다. 책을 읽고 글도 쓸 생각으로 책이랑 노트, 연필을 하나씩 챙겼다. 그런데 결국 쓰지 못했다. 미술관에도 가지 못 했다.


그날의 풍경. 사진을 찍어보니 더더욱 놓칠 수 없었다. 사진엔 다 담기지 않으니까.


눈앞의 풍경을 놓칠 수가 없었다. 책을 보려면 눈을 책 속에 둬야 하고, 글을 쓰려면 눈과 손을 글 위에 둬야 한다. 미술관은 온몸을 모두 데리고 들어가야 하는 곳이고 말이다. 그곳의 그림도 지나면 못 보게 될지 모른다. 그래도 거기엔 기회가 있지 않은가. 해당 전시가 끝나기 전에 한 번 더 방문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풍경은 오늘이 지나면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도저히 거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가지고 갔던 것들을 모두 접어두기로 결심하면서 나에게 물었다. 지금 펜을 놓는 결정은 현명함일까, 게으름일까? 글을 쓰는 건 참으로 의미 있고 생산적인 일이지만, 글을 쓰는 행위 때문에 눈앞의 아름다움을 놓치기도 한다. 글쓰기는 생산이면서 포기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 글을 쓰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3주 전, 아이들의 방학이 3주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즈음 내가 방학병에 걸려버렸다는 것도 깨달았다. 병에 걸린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매일 커피를 두 잔씩 마시고 저녁엔 와인을 따랐다. 드라마 하나에 빠져서는 매일매일 드라마 본방일만 기다렸다. 그런 내가 이상하다고 남편에게 하소연했더니 그가 명쾌한 진단을 내렸다.


"이제 니가 보통 사람이 된 거야."


이상해진 게 아니라 보통이 된 거라고? 음,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는 것도 같았다. 그러니까 나는 평소와 달라진 거지 이상해진 건 아닌지도 모른다. 주변에 하루 커피 투샷씩 마시는 사람이 셀 수 없이 많고, 루틴처럼 밤에 맥주를 따는 사람도 여럿이니까. 좋아하는 드라마에 열광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도 말이다.


문득 회사 다닐 때 친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가만히 있는 게 얼마나 좋은데. 주말에는 가능한 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는 거야. 그게 쉬는 거지." 밤낮없이 일하다가도 출근하지 않는 주말이 오면 밖으로 나가 무작정 걸었다. 어떤 날은 양재에서 출발해 압구정을 찍고 돌아오기도 하고, 코엑스까지 가서 영화를 보고 돌아오기도 하고. 약속이 없는 주말은 대부분 걸으면서 보냈다. 왜였을까. 아마 나는 가만히 있는 나를 견디지 못했던 게 아닐까. 걷고 싶다면 집 앞의 양재천을 산책해도 될 일인데, 매번 새로운 걸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씩 다른 루트로 도시를 걸었다.


사실은 지금도 그렇다. 가만히 있는 게 불안하다. 내 기준 생산성 없는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낼 때 내가 한없이 한심해 보인다. 회사를 그만두고 엄마로만 살면서 나의 가치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도 '육아'라는 일이 가지는 생산성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이 사랑스럽고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다는 나를 인정할 수 있었다.


남편이 나에게 '보통사람'이 되었다는 진단을 내렸을 때, 나는 나에게 왜 갑자기 '보통사람'이 된 거냐는 질문을 했다. 그 결과로 '방학병'이 도출됐다. 생각의 과정은 이랬다. 일단 내가 평소와 달라졌다. 언제나 눈에 띄게 꾸준하다거나 열심히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 무엇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카페인의 중독성이 싫어 커피에 조심스러운 사람이 하루 두 잔씩 마시기 시작했고, 마시지 않을 이유가 더 많았던 알코올이 (단지 와인 정도지만) 좋아졌다. 남편이 놀리듯 '보통사람'이라 말한 데는 평소의 내가 너무나 반대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무언가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바로 떠오른 게 방학이다.


그런데 방학병이 왜 쓰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진 걸까? 방학이 왜 스트레스인지를 파고들다 보니 '글쓰기'가 걸려 나왔기 때문이다. 방학이란 어쩔 수 없이 아이들 케어가 늘어나는 기간이다. 나처럼 회색지대 엄마로 다른 이의 도움 없이 온전히 아이들을 돌보며 애매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갈등이 교차하는 때이기도 하다. 일이 불안정한 대신 선택권이 있다. 선택권이 있어 자유로운 대신 선택할 수 있어서 늘 고민하게 된다.


방학이 되면서 아이와 내 일이 그렇게 부딪혔다. 첫째에게 일이 생겨 시간과 마음이 더 많이 필요하고, 둘째의 유치원 졸업과 입학 준비가 겹쳐 물리적으로도 바쁜, 그런 방학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지난 방학과는 무게가 달랐는데 그걸 깨닫지 못했다. 글쓰기 프로젝트를 차질 없이 진행하고, 내 글을 정기적으로 쓰겠다는 계획이 공기를 팽창시키는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이 공기와 저 공기가 팽창해서 가득 차 버린 공간 한가운데 끼어있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매일 아이들 세끼를 챙기고 숙제를 챙기고 마음을 챙기고, 그러면서 내 일도 하고 있었다.


문제는 내가 아이들 케어를 생산성 바깥 영역으로 분류하고 있었다는 거다. 그러니 많은 것을 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꾸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나를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과의 시간이 자꾸 힘들어졌다. 써야 할 글을 쓰지 못하는 모든 시간이 스트레스가 되었다. 내 방학병은 단지 아이들을 챙겨야 해서 생긴 게 아니었다.


그래서 글을 쓰지 않기로 했다.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이 가려버린 일상을 찾기로 했다. 써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던 시간을 버리고, 아이들과 웃고 싸우고 먹고 자기로 했다. 개학하고 다시 쓰기 시작하면 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여행을 가서도 마찬가지. 창 밖 보는 시간을 희생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3주를 보내고 오늘 여기로 복귀했다.


나는 가끔 이렇게 쓰지 않기로 결심한다. 쓰지 못하는 시간을 인정하는 건 다시 쓰기 위해서다. 대신 이럴 땐 이유를 확실히 해 둔다. 그게 혹시 쓰기 싫어서 만들어 낸 핑계는 아닌지 묻는다. 핑계라면 타도해야겠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인정한다. 그저 지금은 쓰지 않기를 결심할 때라고. 대신 돌아갈 길을 잃지는 말라고. 그러려면 이유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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