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천성이 예민하다. 예민한 나를 알고 예민하지 않게 반응하려고 노력하며 살았다. 거기에다 완벽주의자다. 아니, 완벽주의자였다. 지금도 그렇지 않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릴 적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 이제는 구멍을 인정할 줄도 알고, 그래도 큰일 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안다.
무엇이든 더 잘 해내야만 할 것 같아서, 누구에게나 YES라고 답해야만 할 것 같아서, 늘 종종거리던 나를 바꾸어 준 한마디가 있다. 자주 떠올리는 이 말 덕분에 새로운 연재를 시작하게 됐다. 가만히 생각하면 세상엔 고마운 사람들이 많고, 그들이 해준 고마운 말은 나를 키웠다.
고등학교 때였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화장실에 자주 가는 게 불편해 병원에 갔었다. 불편해하는 내가 걱정이 됐는지 엄마는 큰 병원에 예약을 잡았다. 그런 병원이 으레 그렇듯 접수하고 선생님 잠시 만나고는 각종 검사부터 했다. 검사 결과를 보러 가던 날, 진료실에서 의사 선생님과 마주 앉았다.
검사 결과,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나의 방광이 일반 성인의 그것에 비해 작다는 것이었다. 어린이 방광크기에서 자라지 않은 수준이라고 했다. 너무 불편하다면 수술도 가능하지만 수술을 감수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는 의견도 덧붙이셨다. 이런저런 상담 끝에 나는 이대로도 괜찮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냥 남들보다 조금 더 자주 화장실 가면 되지, 뭐. (그렇게 쭉 살아온 지금, 나는 그때 굳이 병원에 갈 일도 아니었다고 느낀다. 예민하지 않았다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살았을 정도다 싶다.)
검사 결과와 눈에 보이는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끝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자세를 고쳐 나를 똑바로 보고 앉았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는 듯이.
"환자분, 방광 크기도 그렇지만 더 중요한 건 마음이에요. 너무 애쓰고 너무 신경 쓰고 그러다 보면 자꾸 더 화장실이 가고 싶어 지거든. 뭐든 더 잘하려고 애쓰지 말고 마음을 편하게 가져요. 그게 더 중요해요."
"네. 알겠습니다."
"아니, 그럴 땐 노력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뭐든지 다 마음먹은 대로 해낼 수는 없잖아요. 지금도 신경 덜 쓰겠다고 대답하면 갑자기 딱 신경 안 쓰고 그럴 수 있어요? 그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 하지만 지금 노력하겠다고 하면 그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노력만 하면 그건 거짓말이 아닌 게 되는 거지. 나와의 약속을 지킨 게 되는 거예요. 꼭 완벽히 하지 못하더라도 그냥 노력만 하면 충분해. 매번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그냥 노력하겠다고 하면 돼."
"아, 네. 노력할게요."
그날 나는 다른 마음을 얻었다. 노력하겠다고 대답할 수 있는 마음. 매번 그러겠다고 대답해 놓고 다 해내지 못해 조급하던 마음은 버렸다. 원래부터 나는 완벽할 수 없는 거였다. 세상에는 YES와 NO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노력하겠다는 대답도 있다.
그날 이후 긴장 푸는 방법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한다. 고등학교 때의 화장실 이슈도 약간의 방광 크기 문제와 훨씬 큰 심리적 문제의 결과라는 걸 안다. 그날의 의사 선생님은 비뇨기과 전문의였는데, 어떻게 내 마음의 문제를 정확히 알았던 걸까. 심지어 검사 결과 눈에 보이는 물리적 이상도 발견했는데 말이다. 애정하는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보면서 그날을 추억한다. 진료실 풍경도, 선생님 얼굴도 다 잊었지만 여전히 기억하는 이 말을 떠올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