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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냐 정 May 16. 2024

그건 너를 믿는다는 증거야

힘이 들 땐 말이야...

입사 2년 차. 좋은 직장에 입사했고 좋은 고과도 받았다. 모든 게 잘 흘러가고 있는 것 같은데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바빴다. 건강도 많이 나빠져 내 나이 스물다섯에  대상포진에 걸렸다. 병원에서는 2박 3일이라도 일단 입원하자고 했다. 쉬어야 낫는 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회사에서는 절대 휴가는 줄 수 없단다. 그 상태로 일하며, 진통제 주사 맞고 돌아와 전략회의에서 PT를 하고 진통제 싸들고 해외 출장도 갔다. 한 달이 넘도록 진통제 용량만 높이다가 연말이 되어서야 쉴 수 있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순히 일이 많고 바쁜 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일 많기로 유명한 회사다. 그걸 모르고 입사하진 않았다.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내가 그리 잘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왜 대상포진에 걸린 사원 나부랭이에게 꾸역꾸역 중요한 일을 시키냐는 거였다. 대상포진 때만 그런 게 아니다.


부서배치 후 업무 제대로 시작한 지 한 달 정도 됐을 때 있었던 신기술 교육 출장 때도 그랬다. 신기술은 한국어로 설명 들어도 잘 모르고, 영어 PT는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데다가, 여권기간까지 만료되어 재발급 기간을 기다리려 하는 애를, 굳이 보냈다. 아직 업무 파악이 제대로 된 것도 아니니 기존 담당자가 가는 게 낫다는 사수의 말에도 부장님은 꿈쩍 않고 나를 보내야 한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쏘냐가 담당자잖아."


한 번은 스키장에 갔다가 손목 인대를 다쳤다. 하루종일 앉아서 컴퓨터 문서작업을 해야 하는 애가 손목을 다쳐서는 자꾸 속도가 느려졌다. 답답한 마음에 반깁스를 풀고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다 결국은 통깁스를 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그 무렵에 또 출장이 있었다. 5일 동안 3개국을 도는, 노트북 메고 캐리어 끌고 공항과 호텔과 법인사무실을 매일 이동해야 하는 그 출장을 또 내가 갔다. 한 팔에 깁스하고 짐 잔뜩 들고 발로 문 밀고 들어오는 나를 발견하고 달려오던 법인 담당자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배가 아파 응급실에 갔다가 췌장염 진단받고 금식하고 있을 때였다. 당장은 입으로 아무것도 넘기면 안 된다는 말에 물도 못 마시고 내시경 검사를 기다리면서 회사에 전화했다. 며칠 못 나간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전화기를 타고 돌아온 답은 이랬다. "안 되는데. 중요한 보고가 잡혔는데, 네가 와야 되는데." 으응? 아니 내가 지금 물도 못 마셔서 링거로 겨우 버티면서 검사 기다리고 있다는데 어쩌라는 거야. 이번에는 정말 아무 답도 할 수 없어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


그 무렵, 새벽에 출근하더니 새벽에 들어오고 다시 새벽에 나가는 나를 지켜보던 동생이 그랬다. "언니, 나는 절대 언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썩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지 싶었다. 사실 나도 이게 맞나 싶었으니까. 숨 돌릴 틈 없이 돌아가는 업무 때문에 내 행복은 사라지고 없었다. 유독 반짝인다던 내 눈동자가 빛을 잃은 걸 깨달은 것도 그즈음이었다. 


짧은 연휴를 맞아 부모님이 사는 부산에 갔다. 오가는 길이 멀고 힘들더라도 회사와 먼 곳에서 쉬고 싶었다. 오랜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매일 일만 하고 사니 할 이야기라고는 온통 회사 일 뿐이었다. 그 안에 불평불만도 잔뜩 묻어있었을 거다. 한참을 듣던 아빠가 말했다.


"쏘냐, 네가 힘들다는 건 회사에서 그만큼 너를 믿는다는 증거야. 회사는 믿지 않는 직원에게 일을 주지 않아. 가르쳐가며 중요한 일 맡기지도 않고. 그런데 너는 계속 중요하고 명확한 일을 맡고 있잖아. 너에게 일이 많은 건, 회사가 너를 믿기 때문이야."


여전히 조직에서 일하는 아빠가 내 회사생활의 롤모델일 때가 많았다. 이런 말을 내게 건네는 아빠가 있어서 좋았다. 다시 인생 선배에서 딸아빠로 돌아와서는 "근데 너무 힘들면 그만둬도 돼. 공부하고 싶으면 대학원에 가는 것도 고려해 보자." 하셨지만 내 맘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이 말 이후에, 힘듦을 바라보는 기준이 달라졌다. 나를 힘들게 하는 일의 가치를 살펴보게 된 것이다. 그게 가치 있는 일이라면 왜 이 일이 나에게 왔는지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누군가의 믿음에 감사하게 되기도 하고, 미래를 꿈꾸게 되기도 한다. 힘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반짝이는 눈빛을 잃지 않을 수는 있다. 나는 내가 가치를 느끼는 일 앞에서는 덜 지치는 사람이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은 아무리 믿음에 기반한 일이더라도 적당히 해야 한다는 걸 안다. 때로는 나를 이용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여전히 이때 들은 아빠의 말은 자주 내게 응원이 된다. 믿음과 이용을 적당히 가려낼 수 있는 경험을 가진 지금, 나를 믿어주는 사람을(혹은 조직을) 알았을 때 느끼는 감사는 더 크다. 이제 나는 누군가가 내게 일을 맡겼을 때, 나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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