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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냐 정 May 23. 2024

실제로 보니 괜찮은 친군데?

어떤 사람인 줄 아셨던 건가요?

고등학교 1학년, 새로운 학원에 처음 간 날이었다. 교실에 들어서는데 분위기가 이상하게 싸했다. 첫날이라 아는 사람이 없어 어색하다고 하기에는 지나친 거리감이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된 듯한 정적. 힐끗거리는 시선도 느껴졌다. 왜 그런지 알지도 못하고 빈자리에 앉았다. 



수업이 끝났다. 선생님이 전할 말이 있다길래 교무실에 갔다. 교무실로 부른 목적이 뭐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첫날이니 몇 가지 공지사항이 있었던 것 아닌가 싶다.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한 마디는 마지막에 툭 던져졌다. "실제로 보니 괜찮은 친군데?" 


으응? 실제로 보니? 그럼 실제로 보기 전에 어떻게 생각했다는 거지? 아무런 이유 없이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닌데? 궁금했지만 묻지 못했다. 당시의 나는 꽤나 소심했고, 별거 아니다 싶은 일로 되물을 성격이 못 됐다. 


다음날 (아마도) 학교에서, 친구 A가 나를 불렀다. "내가 너한테 얘기를 해 줘야 할 거 같아서... 사실은 네가 학원오기 전날 B가 사람들한테 네가 싫다고 하면서 울었어. 싫은 이유도 말하고." A와 B 모두 초등학교 동창이다. 원래부터 친하지 않았지만 언젠가부터는 B가 특별히 나를 싫어하는 게 느껴졌었다. 더 친절한 친구가 되려 노력했지만 소용없는 것 같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일까지 생길 거라고는 예상치 못 했다. 당황스러웠다. 


그 이유가 무어라고 했는지 물었다. 듣고 나니 더 황당했다. B가 초등학교 때 어떤 장면을 목격했는데 (그 장면에 내가 있었던 건 아니고) 거기에 내가 관련되어 있고 그로 인해 본인이 손해를 봤다는 얘기였다. 그게 진짜라면 충분히 기분 나쁠 수 있겠다 싶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오해라는 사실. 그 장면에서 유추해 낸 다음 이야기는 개연성이 없을 뿐 아니라, 사실이 아니었다. '아, 겨우 이런 이유 때문에 내가 그렇게 미움을 받아왔다고? 지금은 나를 처음 알게 된, 앞으로는 같은 교실에서 공부해야 할 친구들에게도 똑같은 오해를 받게 된 거고?'


모든 상황을 알고 나니 당장 하교 후 학원에 갈게 깜깜했다. '나는 어떤 얼굴로 교실에 들어가 앉아야 할까. 뜬금없이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이야기 들은 친구들이 어느 정도로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도 모르는데 긁어 부스럼만 만드는 일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기도 억울한데.' 갖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굴러다녔다. 그러다가, 전날 학원 교무실에서 선생님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실제로 보니 괜찮은 친군데?"


실제로 보니 괜찮은 친구. 선생님은 나를 그렇게 칭했다. 친구들과도 똑같은 과정을 거치면 되지 않을까? 교실에서 함께 공부하면서 겪어보니 괜찮은 친구가 되면 된다. 그렇게 되뇌면서 여전히 무거운 마음으로 학원에 갔다. 하루하루 친구들 눈치를 봤다. 그리고 이내 알게 됐다.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는 친구들이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걸. 첫날의 냉랭함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다시 떠올리면서 생각한다. 그때 선생님이 알려줬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첫 등원 전부터 험담의 대상이 된 나에게 상황 설명이라도 해주고 필요하면 도움 청해도 된다고 말해주기만 했어도 낫지 않았을까. 아쉽게도 당시에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대로 감사하다. 선생님이 별생각 없이 툭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 그래도 그 말 덕분에 나는 다음 날도 용기 내어 학원에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로도 오래 나를 단단하게 하는 말이 되어주었다.


그날의 경험은 억울한 일을 맞닥뜨릴 때마다 쓰러지지 않고 버틸 힘이 되었다. 중요한 건 이야기 속의 내가 아니라 실제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나다. 그리고 언제나 기회는 있다. 나를 오해하는 사람들의 생각도 바꿀 수 있다.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진짜 나를 보여준다면 말이다.


어제 어릴 적 인연을 오랜만에 만났다. 고등학교 때 이후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동생이다. 어린 시절 추억만을 공유한 인연이라 묻고 싶어졌다. "니 기억 속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어?" "언니는 흑역사가 없는 사람이었어요. 언니를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언니 싫어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을 거예요." 


나에게는 어린 시절 강렬하게 미움받은 기억이 몇 있다. 이유도 모르고 미움받은 경험 탓에 내 성격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제 만난 동생과 대화하다가 알았다. 내 기억에 왜곡이 있다는 걸. 미움을 너무 크게 받아들였다. 나를 좋아해 준 사람들의 마음은 무심히 넘기고 말이다. 나와는 달리 구석구석 세심하게 기억하는 동생 덕에 몰랐던 나를 알게 됐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꽤 많이 있었다. 보통의 사람들처럼 나를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 관심 없는 사람, 골고루 가진 한 명이었던 거다. (어제 만난 동생은 그중 나를 좋게 봐주는 사람이었고 말이다.)


나는 앞으로도 실제로 보니 괜찮은 친구로 살고 싶다. 세상 살다 보면 다양하게 어긋날 기회가 너무 흔하지만, 진짜 나를 보여줄 때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다. 내가 단단하고 다정하게 살아가기만 하면 괜찮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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