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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식마도 식집사가 될 수 있을까?

선인장도 죽습니다.

by 쏘냐 정

"제가요, 선인장도 죽여본 사람이거든요." 선인장뿐만이 아니다. 우리 집에 들어온 식물 중 살아나간 식물은 (내가 기억하는 한) 하나도 없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일단, 바쁘다. 나는 바빠지면 선택과 집중을 중요시한다. 주로 선택받는 것은 '일'과 '육아'(이제는 애들이 커서 '교육'이라고 해야 하나). 나머지는 '아웃오브안중'이 되고. 바쁜 거 쳐내고 정신 차려 보면, 여러 군데 폐허가 되어있다. 식물도 항상 그 영역에 포함되었고.


물론 항상 바쁜 건 아니다. 선인장을 죽였을 때는 여유 있는 시즌이었다. 예쁜 선인장 오래오래 잘 키우고 싶어서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쑥 뽑혀 버리는 것 아닌가. 뿌리가 썩어버린 거다. 이유는 물을 너무 많이 줘서. 사랑이 넘쳤나 보다. 제대로 알아볼 정성은 부족했고.


이후로는 집에 식물들이기를 삼갔다. 아이를 키우고 아이들이 계속 어딘가 다니다 보니, 원치 않는 식물이 생기기는 했다. 강낭콩도 키우고, 토마토도 키우고, 또 뭘 키웠더라.. 관찰일지 숙제도 해야 하고, 이왕 집에 들어온 식물이니 분명 정성을 들였다. 강낭콩은 넝쿨이 타고 올라 천장까지 닿아 신나기도 했는데 결국 죽음 엔딩. 도대체 이유가 뭐야. 고민하다가 답을 찾았다. 우리 집이 동향이라서, 해가 아침에만 든다. 주변 아파트 그림자 때문에 오전까지도 아니고 딱 아침 10시 이전에만 드는 해. 그러니 잘 될 리가 없지. 합리화했다.


그러던 어느 날 파주 헤이리에서 '무계획수집공간'이라는 곳을 만났다. 그리고, 살식마 탈출을 올해 목표로 정하게 되었다. (식물원도 좋아하고 꽃집도 좋아하는 나는, 이 공간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식물을 사랑하는 살식마. 이렇게 슬픈 아이러니라니.)


언제 또 죽을지 모르는 식물을 들이는 덴 명분이 필요했다. 나처럼 이곳의 식물에 푹 빠진 아들이 명분이 되어주었다. 자기 용돈으로 식물을 사고 싶다는 것. 그래. 용돈을 이런데 쓰는 건 매우 유익하지. 못 이기는 척 허락했다. 엄마가 특별히 12월까지 용돈을 모두 가불해 줄게. (아이의 용돈은 일주일에 천 원이다.)


우리 집의 첫 아프리카 식물. 운카리나. 그날 둘째가 몇 바퀴를 둘러보며 골라온 아이다. 우리 집에 올 때는 훨씬 귀엽고 예뻤는데, 집에 오더니 폭풍 성장해서 가분수가 되어버렸다. 강한 해가 짧은 시간 들어오는 우리 집 특성 때문에 잎이 자꾸 넓어지는 거라 한다. 사실 처음 아이가 이걸 골랐을 때는 그다지 예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객관적으로는 덜 귀여워진 지금 내 눈엔 더 예뻐 보인다. 정이 들었나 보다.


사진은 집에 데리고 온 지 두 달쯤 지나서 찍었다. 아침 해가 강해 잎이 엄청 커졌고, 새잎을 틔우기 위해 제일 아래 잎이 갈색으로 변해가고 있다.


두 번째로 들인 아이는 하월시아. 이건 첫째가 구매했다. 동생만 사는 건 불공평하니까, 형도 하나 가지기로. 사실 하월시아는 내가 처음부터 눈독 들였던 아이. 흔히 보는 다육이처럼 생겼는데 위의 평평한 부분에 창이 있다. 분무기로 물을 뿌리고 빛을 비추면 그 부분이 반짝반짝한다. 식물계의 보석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세 번째로 들인 아이. 미니 바오밥. 아데니움 아라비쿰. 이건 첫째가 생일선물로 골랐다. 미니 바오밥까지 우리 집 아프리카 식물 삼총사를 완성했다.


아직 첫 아프리카 식물이 들어온 지 두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이상하게 자신 있다. 이 아이들을 죽이지 않고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다. 자신감엔 근거도 있다. 그건 '무계획수집공간'의 친절한 가이드 덕분.

우리 집 식물존

식물을 살 때마다 이렇게 가이드 카드를 준다. 적정 온습도와 물이 필요한 시기. 내가 생각하는 중요 포인트는 언제 물을 줘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려준다는 거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신호와 함께. 운카리나는 물이 모자라면 잎이 아래로 축 쳐진다.

바로 이 사진처럼. 지금 운카리나의 꽃을 보기 위해 밀당하는 중이라서 많이 쳐졌다. 물 안 주고 버티는 중. 하월시아는 물이 부족하면 잎이 말랑거리고 얇아진다. 마지막으로 미니바오밥은 잎이 만세를 한다. 물이 충분할 때는 잎이 옆으로 촥 펴져있는데, 부족해지면 위로 솟는다. 매일 아침 잠깐 관찰하는 것만으로 아이들에게 물이 충분한지 부족한지 알 수 있다.


가이드만큼이나 내 자신감을 높여준 포인트가 하나 더 있는데, 그건 바로 아프리카 식물들이 가진 물 없이 버티는 능력이다. 몇 달 전부터 키우던 레몬밤이 하나 있는데, 며칠 전 2박 3일 여행을 다녀왔더니 사망했다. 하지만 아프리카 삼총사는 멀쩡하다. 집을 며칠 비워도, 그래서 물을 못 줘도, 걱정 없다. 이 얼마나 든든한가.


아프리카 식물을 들이면서, 식물 키우기가 나의 새로운 취미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VACAY> 서울 편을 만들 때 주택살이를 취재한 적이 있다. 그때 인터뷰어가 말했다. 정원의 식물들은 매일 다른 빛을 보여준다고. 그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고. 부러웠다. 주택에 살 자신은 없지만, 식물이 주는 다채로운 아침은 경험하고 싶었다. 요즘 나는 그러한 삶을 어느 귀퉁이쯤 경험하며 산다. 매일 아침 이 아이들을 살피면서. 잎이 더 쳐졌네, 만세 각도가 좀 달라졌네, 하면서.


이번 취미는 오래 가져가고 싶다. 나의 즐거움뿐 아니라, 분명 살아있는 이 아이들의 수명도 걸린 문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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