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대신 먹어주실래요?
입사와 동시에 대출을 받았다. 회사 앞에 내가 살 원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이라면 대출쯤이야 별거 아니라고 여겼을 텐데, 그때의 나는 어렸다. 내 앞으로 대출이 몇 천만 원이나 있는 게 겁나서 일단 대출금부터 0으로 만들고 싶었다. 매달 월급의 반은 대출금 상환하고, 나머지 돈으로 관리비 내고 공과금 내고 생활비도 했다. 그러니 당연히 여윳돈이 없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같은 부서 친한 언니가 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1년 동안 정말로 하나도 안 샀다고?" 입사할 때 출근복장으로 사둔 옷이 몇 벌 있었고, 대학 때 입던 옷도 꽤 많았다. 출근 복장이 비즈니스 캐주얼이라서 청바지에 티셔츠 입고 출근하는 것도 가능했고. 돈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1년 동안 쇼핑 한 번 안 했는데, 그날 언니가 나에게 그랬다. "소령아, 너 이렇게 일하면서 가끔 너 위해서 써도 돼. 그래야 살지."
6시 반에 집에서 나와 12시가 다 되어서야 퇴근하는 나날.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신입사원 시절. 그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는 언니 눈에 내가 가여워 보였나 보다. 그럴 만도 하지. 어릴 때부터 공부가 재능인 나는 즐기는 덴 재능이 없었다. 내가 제일 부러운 게 잘 노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입사해서는 일만 하며 살았던 거다. 그 주 주말 언니가 잠실에서 만나자고 했다. 처음 가보는 잠실 지하상가에서 1년 만에 나를 위한 쇼핑을 했다. 그리고 몇 주 후엔 이태원. 내 사원 시절을 버티게 해 준 고마운 사람이다.
그 언니가 나에게 알려준 게 하나 더 있다. 취미도 없고 정보도 없는 내게 소개해 준 언니의 베이킹 선생님. 우와, 이거 재밌겠는걸. 다음 학기 수업을 신청했고, 토요일마다 베이킹 스튜디오에 가서 쿠키도 만들고 케이크도 만들고 브라우니도 구웠다. 재료를 계량하고, 곱게 치고, 반죽하고, 굽고. 예쁜 스튜디오에서 맛있는 디저트를 만드는 시간이 좋았다.
베이킹 재료상에 가서 각종 도구를 샀다. 집에 오븐 겸용 전자레인지도 들였다. 토요일에만 굽는 게 아쉬워서였다. 9시에 퇴근하던 어느 날, 너무 이른 퇴근에 남은 밤 시간을 어떻게 하지 고민하다가 한 일도 쿠키를 굽는 일이었다. (9시는 오타가 아니다. 12시에 퇴근하다가 9시에 퇴근하니 남는 시간이 어찌나 황송하던지.) 쿠키를 구우면서 생각했다. '베이킹 안 배웠으면 어쩔 뻔했어. 일찍 퇴근해서 할 일 없는 밤이 오히려 우울할 뻔했잖아.'
문제는 딱 하나. 굽고 나면 먹어야 하는데 다 먹기엔 너무 많다는 사실. 나는 위가 작은 사람이고, 원래부터 먹는 덴 취미가 없다. 기쁨을 위해서는 구워야 하는데, 굽고 나면 쌓이는 음식이 문제였다. 어쩌지? 그래서 찾은 답이 회사에 가서 나눠주기. 월요일이면 친한 동료들이 먼저 물어왔다. "오늘은 뭐 싸왔어?" 취미 덕분에 좋은 사람이 되었다.
비슷한 문제는 커피에 취미를 붙였을 때 또 생겼다. 커피 애호가와 그의 단골집에 갔다가 원두에 대해 알게 됐다. 커피를 즐기지 않기에 몰랐던 원두의 세계는 넓고도 넓었다. 원두마다 맛이 다를 뿐 아니라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게 신기했다. 굳이 직접 해보고 싶어진 건 호기심 많은 성격 탓이었다. 으응? 마시지도 않을 건데 커피는 내리고 싶다고? 그래서 결국 샀다. 한 번만 산 게 아니다. 여러 번 가서 여러 가지를 샀다.
드립 커피 도구를 싸악 구비해서는,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호기심에서 시작된 드립은 한 번으로 끝날 수 없었고, 마실 수 없을 만큼의 커피가 생겼다. 아까우니까 마셔보기도 했다. 그런데 굳이 억지로 이런 일인가 싶은 거다. 이번에도 방법은 회사에서 찾았다. 우리 사무실에만 해도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 엄청 많았으니까. 나만 빼면 모두가 커피를 좋아하는 세상이구나 싶을 정도.
커피 내리는 시간을 출근 전으로 정했다. 6시 반에는 나가야 하니 꽤 일찍 일어나야 했지만, 즐거움은 피곤을 이겼다. 새벽에 일어나 커피를 갈고 정성스럽게 내려서 한 입 맛만 보고 보온병에 부었다. 출근하면 옆 자리 과장님이 쓱 물었다. "오늘도 커피 있어?" 그러면 나는 자랑스럽게 보온병을 내민다. 내 덕분에 요즘 회사에서도 맛있는 커피를 마신다며 좋아하는 과장님 덕에 기쁨이 하나 더 늘었다. 통장 잔고는 조금씩 줄었지만.
당시에 베이킹 수업에서 받은 레시피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17년 전에 받은 소중한 레시피. 그때 샀던 휘핑기도, 파이틀도 그대로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취미가 된 드립 커피 도구도 그대로다. 여전히 커피는 즐기지 않지만, 언제 또 커피를 내리고 싶을지 몰라서 버리지 못했다. 쓰다 보니 옛 즐거움이 떠오른다. 조만간 뭘 굽거나 커피를 내리거나, 둘 중 하나는 하겠는 걸.
*덧. 아이들 방학 기간 동안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어제 드디어 개학을 했고 이번 주 연재부터 다시 이어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