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가해자는 누구인가?
입만 열면 누굴 흉 보느라 정신이 없던 시절이 있었다. 무능한 팀장, 생각없는 후배, 지 밖에 모르는 친구, 도무지 배울 거라고는 없는 선배.. 험담이 험담으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그 끝은 항상 그 모든 이들로 인해 힘들고 고생하는 나에 대한 연민으로 흘러갔다. 남편에게도 늘 원망 뿐이었다. 출장이 잦고, 야근이 많은 업에 종사하는 남편 덕분에, 첫 아이는 거의 혼자 키웠다. 물리적인 시간의 비중 뿐 아니라, 아이를 신경쓰고 케어하는 모든 일상이 독박이었고, 나는 늘 그게 억울했다. 왜 나는 늘 혼자 이걸 감당해야 하지? 내가 뭘 잘못했길래?
바쁜 남편 때문에 맨날 독박이야.
무능한 팀장 때문에 나만 고생이야.
아이들 때문에 아무것도 못해.
때문에.. 때문에..
상황을 탓하고 남을 원망할수록, 나는 점점 불쌍한 피해자가 되어갔다. 만나는 사람마다 고생이 많다고, 힘들겠다고 위로했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괴로웠다. 자기 연민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다 드디어 바닥을 찍을 즈음, 문득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내가 피해자라면, 가해자는 누구인가?
가해자는 없었다. 나는 그들 때문에 괴로워 죽겠는데, 그들은 정작 나를 괴롭히기로 작정한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다. 나를 가장 아끼는 남편, 나를 믿어주는 팀장, 나의 가장 사랑하는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자기의 위치에서 자신의 몫을 하고 있을 뿐, 불쌍한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왜 나를 이렇게 괴롭히냐고 따져 묻는다면, 어쩌면 그들이 더 억울할 일이었다.
가해자가 없다면, 누가 나를 피해자로 만든 것일까? 바로 나 자신이다. 다시 말하면 피해의식이다. 혼자서 감당할 필요가 없는 일들까지 완벽하게 잘 해내려 애썼다. 일도, 육아도, 살림도, 다 잘 하고 싶었고, 직접 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당연히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하는 건 불가능한 도전이었기에 애를 쓰면 쓸수록 좌절과 원망도 커졌다. 도와달라고 하지도 않으면서, 도와주지 않는다고 원망했던 것이다. 다른 이들과의 비교도 한 몫 했다. 남의 남편은 어쩜 그리 가정적인지, 남의 팀장은 어쩌면 저렇게 똑똑한지. 세상에서 내가 제일 열심히 살고, 나만 힘든 것 같았다. 결국 내가 혼자 다 해낼 수 있다는 교만과, 내가 듣고 싶고 보고 싶은 것만 보았던 무지로 인해 스스로를 피해자로 만들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관심의 원)은 내 힘으로 어쩔 수 없지만 거기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내 힘으로 결정할 수 있다. 주도성이란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관심의 원'에 대해서는 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영향력의 원)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것이다. - '일생에 한 번은 고수를 만나라' 한근태 저
내 인생을 나로 살아가는 '주도성'의 출발점은 어떤 것이 관심의 원이고, 영향력의 원인지 구분하는 것이다. 관심의 원은 나를 둘러싼 상황들이다. 출장이 잦은 남편의 일, 지금 내 조직의 상황, 아이들과 부대낄 수 밖에 없는 이 시기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걸 팩트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바꾸려 해도 바꿀 수 없을 뿐 아니라, 거기서 오는 좌절이 내 에너지를 갉아먹기 때문이다.
내가 피해자라는 생각은, 상대방을 가해자로 만든다. 거기까지만 생각하면 그렇게 분하고 원통할 수가 없다. 하지만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들이 정말 가해자인지를 곰곰 생각해본다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나를 독박육아의 소굴로 밀어넣은 남편은, 타지에서 주말도 없이 가족을 위해 애쓰는 중이었고, 엉뚱한 보고서 작성을 요구하던 무능한 팀장은, 경력으로 온 탓에 부서장의 성향을 잘 파악하지 못했던 것 뿐이다. 상황을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그 사람이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는지, 그가 정말 가해자인지를 딱 한번만 더 생각해봐도 관심의 원은 더 이상 내 에너지를 갉아먹지 않는다.
관심의 원을 받아들이는 것 만큼이나 중요한 건 내 영향력의 원을 정확히 아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그 이상을 해내려는 욕심은 또 다른 좌절을 낳는다. 지금의 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그 외의 것들은 도움을 받던지 내려놓아야 한다. 그게 잘 안 되면 자꾸 남을 원망하게 된다. 가해자는 없는데 혼자 피해자가 되어 있는, 피해의식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피해자와 가해자는 처음부터 없었다. 내 상상력의 산물인 피해의식만 존재했을 뿐이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계속 불쌍한 나로 살아갈지, 아니면 밝고 우아하고 에너지 넘치는 나로 살아갈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 후자를 선택한다면, 그런 내가 되는 데에 에너지를 모으면 된다.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평범하지만 소중한 진리를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