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 여행자에서 여행 생활자의 삶으로
진정한 여행 베테랑은 비우는 여행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거늘, 10년을 여행했어도 안 되는 것이 비우는 여행이다. 항상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더 무거워진 배낭 때문에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쿠바에서 살사 배우기 외엔 다른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매일 같은 패턴의 일상이었지만 나쁘지 뭔가 배운다는 것에 재미를 느끼고 있던 터라 즐거웠다. 살사를 추다 보니 운동화에 대한 욕심이 생겼고 남들 겨우 럼이나 시가, 기념품만 사 가는 쿠바에서 쇼핑을 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신던 운동화는 콜롬비아 칼리에서 사 온 짝퉁 아디다스였다. 워낙에 싼 가격에 질도 꽤 좋은 운동화지만 몇 달 신다 보니 그리워지는 오리지널. 길을 걷다 눈에 보이는 아디다스 매장에 들어가 운동화를 살펴보다가 맘에 드는 것을 발견했다. 난 자타가 공인하는 따까냐(구두쇠라는 뜻). 눈이 아래로 갈수록 가격대가 내려가길래 나중엔 쪼그려 앉아 운동화를 보다가 가장 저렴한 가격에 가장 마음에 드는 운동화가 눈에 띄어 바로 신어보고 구매했다.
내 생전 이렇게 개쿨했던 적이 있을까?
운동화를 신은 상태로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한 후, 그대로 헌 신발을 갖고 매장 밖으로 나갔다.
개. 쿨. 해. (자화자찬 중)
아주 맘에 드는 새 운동화! 새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하듯 날뛰어 다녔다는. 다음 날 난 뭐에 씐 것처럼 또 지름신이 강림했다. 다름 아닌 샌들. 이러다가 살사 춘다고 드레스도 살 판.
거리를 지나다가 우연히 발견한 신발가게, 여러 상인들이 모여서 신발을 팔던 곳이었는데 거기서 맘에 드는 샌들을 발견했다. 낮은 굽에 검은색(높은 굽 못 신음), 그리고 디자인도 심플! 줄 길이만 조절이 필요해 새로 구멍을 내고 바고 구매했다. 운동화도 있고 샌들도 있고 이제 살사만 더 잘 추면 된다.
이렇게 뭐가 참 없는 나라 쿠바에서 쇼핑이라니...
저번에 맛있게 먹은 햄버거집을 발견한 후로는 거의 매일 그 집에서 햄버거를 먹었다. 문지방이 닳도록 매일 드나드니 이젠 내 단골집! 갈 때마다 반갑게 맞아주시는 아줌마와 주인아저씨 (두 분이 부부는 아님) 덕분에 기분도 좋고! 한 번은 새로운 먹던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주문해봤다. 저번에 왔을 때 옆 학생들이 먹던 패티 들어간 햄버거가 궁금했어! 치즈까지 얹어서 15cup! (한화로 약 800원)
케첩이 안 뿌려져 있네~~ 아니 아저씨!
이젠 케첩 미리 뿌려 주실 때도 된 것 같은데~
이 튀긴 패티는 혁신적인 맛!!! 쿠바에서 이런 맛의 버거를 먹을 수 있나??!! 너무 맛있어서 감동했다. 이제 다른 것 안 먹고 이 햄버거만 먹어야지!!
햄버거 맛집보다 더 많이 간 곳이 일식당 사유. 쿠바로 여행 오는 사람들이라면 알만한 곳이다. 2015년만 해도 노리꼬라는 다른 일식당도 있었는데 다시 온 쿠바 아바나에는 그 노리꼬가 자취를 감췄다. 한 끼에 음료 포함 2-3쿡, 정말 합리적인 가격에 입맛에도 맞는 음식이라 끊을 수 없었다. 두 번 가면 꼭 한 번은 한국인을 만날 정도니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지 않은가?
모든 여행자가 그렇지만 여행 경비에 맞춰 생활해야 한다. 한 끼 식사 경비가 차이나는 사람끼리 여행하면 그것만큼 스트레스에 피곤한 것도 없다. 럭셔리한 삶을 살아온 사람에겐 배낭여행자가 작은 돈에 연연하는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보통의 삶을 살고 배낭여행만 해온 사람에겐 그 돈은 작은 돈이 아니다. 작은 돈이라 하여 어떻게 하찮게 여길 수 있는가? 대접받는 것도 마찬가지. ‘이 정도면 비싼 것도 아니지’ 하며 상대의 금전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보통의 사람이 생각하는 비싼 곳에서 대접받고자 하는 사람은 배려를 모르는 사람이다. 자기 돈은 귀하지만 남의 돈은 쉽게 보면 안 된다. 가치의 기준과 척도는 다르겠지만 누구에게나 돈은 귀하다.
며칠 전, 조식 먹으러 처음 카페 아르깡헬에 갔을 때 조식으로 4-5쿡을 쓰기엔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서양식 조식을 그 돈 주고 먹기에 아깝다고 생각해서 그럴지도. 물론, 가끔의 호사를 누리기 위함이거나 이 집 조식이 맛있다니 한 번 경험해보고 싶다거나 그렇다면 먹어볼 만하다. 하루 식비를 3끼 최대 10쿡 이내로 쓰던 나에겐 그날이 그랬다. 돈이 부족했던 동행을 위해 ‘내가 돈을 보탤까?’ 하는 생각을 했다가 다른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 덕분에 내 단골 햄버거집을 찾았지)
보통 내가 누군가를 금전적으로 도와줘야 한다면 그건 배낭여행자는 아니다. 배낭여행이라도 해외로 여행 온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돈이 아주 없진 않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돈을 기준으로 아껴 쓰는 것뿐이지 정말 돈이 없을 수는 없다. (무전여행을 하겠다고 해외에서 남에게 민폐끼치고 여행하는 사람을 본 적은 있다) 정말 없는 사람들은 후진국에 사는 현지인들이다. 난 주로 여행자가 아닌 현지인을 돕는다. 현금을 주는 것이 아닌 물건을 준다. 아니면 더 많이 팔아준다.
7년 전, 네팔을 여행할 때 어떤 중년의 여행자분이 하루의 내 방값과 식비를 내주셨다. 한사코 거절했지만 얼마 안 된다며 사양하지 말라고 하시던 분이셨다. 금액적으로 보면 2만 원 남짓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호의는 부담스러워서 몇 번의 실랑이 끝에 난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그럼 감사히 잘 받을게요.
그리고 앞으로 여행하다가
저보다 어려운 사람 도울게요!
바라던 바가 그것이라고 말씀해주신 선생님(중년의 아저씨라 선생님이라 부름)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분이 베푼 호의를 대가로 나중에 뭔가를 내게 받으려고 그러시진 않으셨을 것이다. 참 따뜻했던 시간.
기브 앤 테이크가 중요하지만 그것이 양 당사자간의 동일한 물질을 꼭 주고받아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왜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는 것일까? 끼리끼리만 어울린다면 모를까 모두가 섞여 사는 이 세상은 계속 돌고 도는 법. 더 많은 사람이 덜 가진 사람에게 주고 그 사람이 또 더 없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삶이 아닐까?
커피를 마시기 위해 (조식을 안 먹고 돌아섰던) 카페 아르깡헬에 다시 갔다. 커피 값은 호텔급이지만 워낙 쿠바 호텔도 커피값은 싸기 때문에 그리 비싼 것도 아니다. (아메리카노 1.5-2쿡, 카페라테 2.5쿡 수준 / 쿡 = 달러)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밥값이나 커피값이나 같은 것일 뿐. 자주는 못 가도 가끔 직장인으로 여행 온 분들과 같이 갔다. 여기서 카페라테를 처음 마신 날, 난 과테말라의 내 최애 카페에 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쿠바에서 이런 훌륭한 커피를 마실 수 있다니! 내겐 여기가 조식 말고 커피 맛집!
콜롬비아부터 쿠바까지 난 배낭여행자에서 점점 여행 생활자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여행 중독자였던 내게 여행보다 더 재밌는 것이 생겼으니 큰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여전한 욕심은 쿠바 여자처럼 살사를 추고 싶다는 것. 외국인이 학원에서 배운 살사처럼 추고 싶지 않다는 것. 먹고 자고 춤추고 생활하는데 바빴던 쿠바에서의 시간은 내 인생의 또 다른 변화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