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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더필즈 Aug 21. 2020

가슴 아파서, 잔탁을 먹었어.

중2병 소녀, 상사병으로 잔탁을 털어넣다 

열 다섯 즈음이었을 것이다. 같은 반에 유난히도 빛나는 아이가 있었다. 

특별히 인기가 많았던 아이는 아니니 어쩌면 내 눈에만 빛났을지도 모른다. 당시 유행했던 반무테 안경이 지적으로 어울리고, 웃을 때 작아지는 두 눈이 귀여운 아이였다. 곁에 가까이 가면 은은한 향기가 났고, 나는 나중에서야 그 냄새가 뉴트로지나 바디로션 냄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나에게 지금도 그 향은 그 아이의 향기로 기억되고 있다.  


많은 여중생 또는 여고생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동성 친구에 대해 단순한 우정 이상으로 동경의 마음과 애정을 갖던 시기가 있었고, 그 중 내 마음이 가장 길게 머물렀던 곳은 그 아이였다.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그 아이의 집에 놀러 갔다가 밤이 깊어진 바람에 그 아이의 아버지께서 나를 집까지 차로 데려다 주셨다. 우리는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손을 꼭 잡고, 이어폰 한쪽씩을 귀에 나누어 꽂고 노래를 들었다. 넬의 노래였다. '고양이', 'Thank you'. 지금도 넬의 고양이를 들으면 나는 그 아이부터 생각이 난다.  



그 아이의 말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매우 큰 의미로 다가왔다. 그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에도 쉽게 기뻐졌다가 쉽게 실망하곤 했다. 그런 내 감정을 일기로 써 내려 가면서도, 나는 혹시라도 이런 애틋한 마음을 누구에게 들킬까 두려워 일기장에조차 그 아이의 이름을 직접 쓰지 않고 '파인애플'이라는 애칭으로 대신해 쓰곤 했다.  


어느 날 우리 사이에 새로운 아이가 등장했다. 하얗고 동글동글하고 볼이 발그레한 귀여운 아이였다. 나의 '파인애플'은 그 아이를 무척이나 귀여워했고 둘이 가깝게 붙어 있는 모습이 내 눈에 자주 밟혔다. 나는 심통이 났다. 사랑을 빼앗긴 느낌과 질투심은 이상한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나는 새로이 등장한 그 귀여운 아이에게, 나의 파인애플이 하는 것처럼 똑같이 '나도 네가 좋아!', '나도 네가 귀여워!' 와 같은 제스처를 마구마구 보여주면서도 정작 파인애플과는 대화를 잘 하지 않으려 했다. 무표정과 정색으로 파인애플을 대하는 날이 늘어났고,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던 파인애플은 몇번이나 나에게 왜 그러는지 이유를 물었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질투심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싶지 않았다. 지쳐버린 파인애플은 자연스레 나를 떠나게 되었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좋아하고, 사랑하는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경험을 그 때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매일 보면서도 더는 다가갈 수 없다는 사실에 자괴감과 후회 그리고 상실감이 몰려왔다. 고입 시험을 앞두고 있었지만 아무런 활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숨을 참기도 하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보고 싶은 마음과 원망의 마음을 가득 담아 그 아이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일종의 유서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는 정말 '물리적으로' 심장 언저리가 아픈 것처럼 느껴졌다. 자다가도 가슴 밑에서부터 뜨거운 열이 오르는 것처럼 느껴져 깨기 일쑤였고,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다는 말이 이런 걸 말하는 거였구나, 싶었다.  


그렇게 '가슴이 아파'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내던 어느 날 나는 부모님의 방에서 외국에서 가져온 듯한 약을 하나 발견했다. 영문으로 된 포장 안에서 한가지 눈에 들어오는 단어가 있었다. 'Heartburn'. 

Heartburn = 애타게 가슴 아플 때???


아, 가슴이 아플 때 먹는 약인가. 그렇다면 우울증 약 같은 걸까. '애가 탈 때' 먹는 약인가.

우울증 약이라면 많이 먹으면 의식을 잃거나 그런 거 아닐까. 수면제 성분이 들어 있는 건 아닐까.  



아는 것이 없었던 나는 'Heartburn'이라는 단어가

지금 파인애플로 인해 이렇게 애가 타고 가슴이 아픈 내 상태와 같은 증상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드라마나 영화에서 봤는지는 몰라도, 뭔가 약을 마구 털어넣고 깊은 잠에 빠져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차려보면 다들 걱정스럽게 나를 보고 있을 것이고, 가슴이 아픈 내 증상도 가라앉아 있을 것 같다는 멍청한 생각이 들었다. (* 인터넷과 정보 검색이 지금처럼 발달해 있지 않던 시절이었다...) 


...확실히 중2병이었다.  


몇 알을 먹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히 상용량 이상의 많은 양을 '털어 넣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기절하지도, 아픈 마음이 가라앉지도 않았다. 그냥 뭐라도 반응이 있어야 할 것 같아 일부러 잠을 청했던 것 같다. 그러다 잠에서 깨어 엄마가 차려주신 저녁밥을 잘 먹고 다시 밤에 잠을 '잘' 잤다.


그리고 시간이 아주아주 많이 흐르고 나서야 그 약이 위산으로 인해 속이 쓰린 증상에 먹는 '잔탁'이라는 약인 것을 알게 되었다. 



최근(글을 쓰던 시점, 2019년 9-10월)에 약국가에서는 라니티딘을 대대적으로 회수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NDMA라는 불순물이 검출되어 라니티딘, 그리고 뒤이어 니자티딘까지 일부 회수 조치가 이루어졌다. 약국에서 잔탁을 비롯한 여러 라니티딘 제품 재고를 빼 두는 작업을 한참 하다가, 문득 그 날이 생각나 괜히 혼자 부끄러워졌다. 생각해 보면 파인애플에 대한 아픈 마음과 스트레스 때문에 당시에 진짜 'heartburn' 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가슴에서 열이 나는 것처럼 아팠으니까. 아주 잘못된 약 선택은 아니었을거야..... 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지금 파인애플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 아이도 넬의 고양이를 들으면 나를 떠올릴까. 

자기 때문에 heartburn이 나타나 잔탁을 털어넣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겠지만, 그래도 가끔은 나를 기억해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잘 지내니 파인애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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