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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log Nov 11. 2024

사랑하는 말과 미워하는 말

함부로, 애틋하게

살면서 특별히 더 마음이 가는 단어가 생겼고 싫어하는 말도 생겼다. 우연하게도 둘 다 ''을 겪으면서 알게 된 용어들이다.




신혼집을 구하고 혼수를 들였다. 환경호르몬이 없는 최고등급의 E0 표시가 붙은 제품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전부 새 가구이다 보니 눈이 따끔거리나 피부 발진이 생기는 등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났다. 창문을 열어놓고 부지런히 환기를 시키는데도, 소파에 앉거나 안마 의자에 오래 앉아있으면 눈꼬리부터 간지러움이 시작됐다. 설상가상으로 겨울이 시작되니 하루 내내 창문을 열어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매장에 문의도 해보고 피톤치드 수액도 뿌려보고, 물 묻은 수건과 마른행주로 하루 종일 가구들을 닦고 청소했지만 차도가 없었다.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여서 그런지 항암치료 이후 없었던 알레르기들이 자꾸만 생긴다.


결국 나는 근처 큰 도시에 아토피와 알레르기 피부과로 유명하다는 병원을 예약했다. 당독소 검사, 알레르기 진단검사, 소변검사와 혈액검사가 이어졌다. 종종 특정 성분이 들어간 화장품을 사용하고도 발진이  적이 있어 내가 사용하고 있는 화장품과 클렌징 제품도 모두 가져가 피부 테스트를 다. 검사결과에 따르면 별 다른 특이사항은 없었다. '새 집 증후군'과 같은 '새 가구 증후군'이 제일 유력하지 않을까 싶었다.


몇 가지 검사를 하기 전 진료실에 먼저 들려 의사 선생님과의 면담이 있었다. 새로운 병원에 가게 될 때면 초진차트를 작성하거나 의사와의 문진이 제일 부담스러웠다. 불편한 부위를 설명하려면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지만 '병력, 수술 경험, 수술 횟수, 복용하는 약...' 등의 물음에는 해당사항 '없음'으로 체크할 수 기 때문이다. 주관식 답안지를 작성하 듯 꽤 무언가를 많이 적어야 했다. 소신껏 작성해서 간호사에게 제출하면 차트를 쓱 한번 훑어보고는


"어떤 병으로 수술하셨어요? 지금은 완치되신 거예요?"

추가적인 질문이 이어지는데, 나는 병명을 하나를 말해야 할지 두 개를 말해야 할지 늘 고민한다. 대부분은 '유방암' 하나만 이야기한다. '폐암'까지 말하면 그냥 왠지 마음이 슬퍼진다. '완치'라는 단어 앞에서도 한참을 망설이다

"아 그게... 재발을 좀 자주 해서 수술을 여러 번 받았는데요. 지금은 검진만 하고 있어요."

그러면 간호사는 언제, 언제 수술했는지 불러달라고 한다.

'너무 많은데... 다 이야기해야 하나...'

나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행여 옆 사람이 들을까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숫자들을 한다.

"2006년, 2014년, 2015년, 2017년, 2018년, 2021년..."


나를 올려다보는 간호사의 눈빛이 달라진다. "그렇게나 많이요?"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다. 간호사는 내가 한 이야기들을 차트에 적느라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그래도 접수대에서의 문진은 나은 편이다. 진료실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의사와의 상담이 시작되면 조금 더 깊고, 의학적인 이야기들을 나눠야 한다.

"수술은 어떻게 했는지, 먹고 있는 약의 종류는 무엇인지, 항암과 방사선 치료는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 지금 상태는 어떠한지..." 등등

몸이 하나라 내 몸에서 오는 질병이나 질환이 연결성을 가질 수도 있어서 꼼꼼히 물어보고 체크한다. 점점 무거워지는 진료실의 공기에 마음이 착 가라앉곤 했다.


피부과 의사는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 선생님이었다. 나는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내 병에 대해 설명했다. 의사는 몇 가지 추가적인 질문을 이어갔다. 마지막 수술이 언제였는지 물어보던 선생님은

"식습관은 좀 어떠세요? 운동은 매일 하시죠? 요즘 맨발 걷기가 좋아요. 맨발 걷기 꼭 하세요. 저도 하고 있는데 암환자분들에게 꼭 권하는 운동입니다. 비타민 주사 맞으시나요? 고용량 비타민 주사 세종에도 찾아보면 있을 거예요. 여기 와서 맞기 어려우시면 그것도 꼭 맞으시고요."

병원이 익숙한 나는 상술인지 꼭 필요해서 권하는 진료인지 잘 구분하는 편인데, 다정하게 진심으로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시는 의사 선생님의 태도조금은 긴장이 풀렸다. 

"결혼은 하셨다고 하셨나요?"

나는 얼마 전 결혼식을 올렸다고 말했다.

"남편분이 아주 애틋하시겠네."

"네..."



애틋하다: 형용사
1. (마음이) 애가 타는 듯이 깊고 절실하다.  
2. (마음이) 정답고 알뜰한 맛이 있다.



나는 '애틋하다'라는 말을 사용하는 상대를 처음 만나는 것 같았다. 알고 있는 말이지만 막상 들어본 것은 처음인 단어. 나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말이구나 싶었다.

'애틋하다. 애틋하다.'

몇 번을 읇조리며 집으로 향했다.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나는 대뜸 물었다.

"여보, 여보는 내가 애틋해?"

"그러엄~ 애틋하지. 당연히 애틋하지. 근데 왜?"

"아니 오늘 피부과 가서 의사 선생님이랑 이야기하는데, '남편분이 아주 애틋하시겠네.'라고 하시더라고. 그래서 물어봤어."

계란말이를 돌돌 말며 마음이 뜨끈해졌다. 그 후 지금까지 '애틋하다'라는 말을 고이 접어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다.




반면에 싫어하는 말도 생겼다. 인터넷 용어처럼 사용되는 말 중에 '암 걸리겠다', '암 유발자'와 같은 표현이 있다. SNS 댓글 속 이런 단어들은 어린 학생들이 잘 몰라서 사용하는 건가 싶었는데, 종종 막장 드라마 속 악역을 설명하면서 '암 유발자'라는 단어가 기사에 등장하는 걸 봐서는 공공연하게 통용되고 있는 말이었다.

이런 단어들이 불편했던 이유는 내가 바로 그 '암'에 걸린 사람이라서겠지만, 프로 불편러의 시각으로 바라본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가볍게 함부로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암환자 본인이나 암에 걸린 가족, 친척, 친구가 있는 사람들은 이마 이해할 거라 생각한다. 부정적인 상황을 표현하는 단어로 '암'이라는 어를 쉽게 사용하는 모습은 환자들이 겪는 육체적, 심리적 고통을 헤아리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슷한 예로 나 역시 무심코 사용했던 '선택장애'라는 말이 있다. 지나치게 우유부단한 사람을 말하는데, 여기서 ‘장애’는 남들보다 열등하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이 공공연히 사용될 경우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을 고착화할 수 있다는 글을 보았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지만, 농담처럼 쓰이는 말에 상대의 결점을 이용했다면 당사자에게는 큰 상처가 될 것이다. 특정 질병에 빗대어 사람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신조어들은 지양했으면 좋겠다.




제6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를 통해 세상에 나온 책 중 김버금 작가의 <당신의 사전>이라는 책을 좋아한다. 작가는 설명할 수 없는 마음들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기 위하여 글을 썼다고 했다. ‘모든 마음에게는 이름이 있다’고 하면서.


'애틋하다'라는 말을 나의 사전에 수록하고 싶다. 남편에 대한 나의 마음을, 나에 대한 남편의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암 걸리겠다'라는 말은 영영 사라졌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거짓말처럼 '암'도 지구상에서 사라지면 제일 좋을 것 같다. 그것도 아니라면,

"암에 걸리셨어요? 요 앞에 약국 가셔서 3일 정도 약 드시고, 며칠 푹 쉬시면 괜찮아질 거예요."

라고 말하는 세상이 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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