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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log Nov 14. 2024

그 시절 내가 사랑했던 TV

힘이 되어준 프로그램

폐 수술을 앞두고 나는 좌절할 힘도 없이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누웠다. 같은 암이어도 유방암과 폐암이 주는 무게는 확연히 달랐다. 생각해 본 없는 장기인데 조직검사도 없이 바로 수술이라니. 안에 그것도 갈비뼈 안쪽에 있는 폐에서 어떻게 조직을 떼어낸다는 말인가. 상상도 안 가는 공포감에 두려움이 밀려왔다. 사흘간 꼬박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며 눈만 깜빡거릴 뿐이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왔지만 또다시 소파를 찾아 굼뜬 몸을 뉘었다. 창가로 햇살이 쏟아져 눈이 부셔도 계속 흐리멍덩하게 허물어져 있었다.

2년 수술 이후 겨우 찾은 평안인데, 다시 난리통으로 들어가야 하는 현실이 속상했다.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것처럼 세상이 아무 없다는  평화롭게 돌아가는 것도 모두 러웠다.


그러다 문득

'정말 나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이렇게 누워만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곧바로 일어나 샤워를 하고 어머니와 함께 새로 생겼다는 대형 쇼핑몰로 향했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생면 파스타를 맛보았다. 한 줌밖에 안 되는 것이 무척 비싸고 엄청 맛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입맛은 살아있구나' 싶었다. 역시 뭐라도 하려면 우선 잘 먹고 봐야 한다.




수술을 앞두고 온갖 걱정과 두려움으로 잠 못 이루었을 때 나에게 가장 힘이 되어준 것은 '팬텀싱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크로스오버 남성 4중창 결성을 위한 프로젝트로 성악가, 학생, 직장인, 뮤지컬 배우, 연극배우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출연하여 최후의 4인을 가리는 음악 경연이었다.


다시 보기 사이트를 통해 '팬텀싱어2'를 시작으로 시즌1까지 모두 섭렵하는 데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좋아하는 곡이나 마음에 드는 가곡과 팝송 등이 나오면 보고 또 돌려봤다. 음원 사이트에서 따로 플레이 리스트를 만들어 운전을 하거나 운동, 외출할 때도 즐겨 들었다.

최고의 화음을 이루며 인간의 목소리로 빗어낸 노래들을 들으며 연신 "브라보! 브라비!"를 외쳤고, 벅찬 감동과 짜릿한 희열에 손뼉을 치며 혼자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했다.  


수술 일정을 기다리고, 그 결과를 기다리는 피 말리는 날들을 '팬텀싱어'라는 프로그램 덕분에 덜 초조하고 조금만 슬플 수 있었다.

노래를 부거나 음악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신 안정은 물론 감정을 발산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특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정필립, 이충주, 조형균, 고우림이 부른 <La Vita>라는 이탈리아 가곡이다. '공허와 슬픔 속에서도 우리의 삶은 아름답다'는 내용으로 시원한 고음과 행복해지는 가사로 전율을 일으키는 노래였다.


Qualche volta abbiamo come un senso di paura Della vita

우리는 가끔 삶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지.

Anche se ci sono tante cose che non vanno Nella vita

삶 속에서 많은 것이 뜻대로 되지 않기에

Ma che cosa pretendiamo cosa ci aspettiamo Dalla vita

우리는 인생에서 무언가를 바라고 기다리고만 있는가?

No non è possibile Sprecare inutilmente Questa vita

아니, 이 삶을 헛되이 버리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네.

Ah la vita, Più bello della vita non c'è niente

아, 인생이여! 이 삶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네.


파워풀하고 웅장한 사운드로 심장을 쿵쾅거리게 만드는 이 노래에는 '아, 인생이여! 이 삶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네.'라는 구절이 반복된다.


나는 생에 가장 힘든 순간 <La Vita>라는 노래를 들으며 시련을 헤쳐나갈 용기를 얻었다. 무엇보다 나에게 주어진 '삶' 그 자체를 소중히 여기며 맥없이 누워 인생을 낭비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작년 봄 결혼을 준비하면서는 '팬텀싱어4'의 <D'istinto e di cuore>라는 곡을 무한 반복하며 삶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했다.


그 후 가족들과 팬텀싱어 갈라 콘서트에도 갈 만큼 열혈 시청자가 되었고, 지금도 나의 플레이 리스트에는 시즌 1부터 4. 그리고 올스타전에서 나왔던 곡까지. 팬텀싱어들의 멋진 노래들이 가득하다.  




힘이 되어 준 또 다른 프로그램은 '유 퀴즈 온 더 블록'이다. 유재석과 조세호가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직접 찾아가 담소를 나누고 퀴즈를 내는 예능 프로그램으로, 시작은 길거리에서 평범한 시민들의 인터뷰를 담았지만 코로나 이후에는 미리 섭외된 인물들과 실내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유퀴즈'는 항암치료 중 월정액권을 결제해서 본 유일한 프로그램이기도 다. 출연자 분을 '자기님'이라고 통칭하는데, 일반 시민분들의 인생 여정을 돌아보고 중간에 나오는 자막과 영상, 짧은 인터뷰들이 조화롭게 잘 어우러져 감동을 주었다.


설악산의 마지막 지게꾼, 지하철 택배원 할아버지, 환경미화원 시인 등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할 일을 하며 하루를 밝혀가는 분들의 인터뷰가 감동적이었고, 장기이식 코디네이터, 필경사, 관제사, 법의학자와 같이 생소한 직업을 가진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이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시간이 흘렀고 끝난 후에도 마음 한 구석에 따뜻함이 남아 좋았다.


한 번은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과거의 나에게 하고 싶은 말'에 대한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어린 날의 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이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목이 메는 듯했고 눈물을 글썽이는 분들도 있었다.


나도 스무 살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러보았다.


"이나야...... 너무 애쓰지 마.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살아보니 어차피 될 일은 되고, 안 될 일은 안되더라. 그러니까 너무 애쓰지 마. 잘하려고 하지 말고."


괜찮아지려고 이겨내려고 애쓰고 있는 이십 대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였다. "그냥 되는 대로 살라고. 너무 힘들게 살지 말라고." 노심초사하면서 살아도, 유유자적하며 살아도 아침은 밝아오고 세월 간다말해주고 싶었다.

걱정 많은 인생이었지만 조금 덜 생각하고, 힘을 빼고 살았더라마음이 편안했을 같다.




누가 TV를 '바보상자'라고 했는가.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TV는 길어진 투병 생활로 집순이가 되었던 나에게 둘도 없는 친구였고 때로는 선생님 같은 존재였다.


세종시 어딘가에서 자전거에 올라 이탈리아 가곡을 흥얼거리며 가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나다.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왕쑥뜸'이 좋다기에 매일 자전거를 타고 한의원으로 향한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신중하게 고른 팬텀싱어의 명곡들이 흘러나온다. 페달을 신나게 돌리며 나의 하루도 경쾌하게 시작된다.  


살아있어 감사한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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