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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log Nov 15. 2024

소유한다. 고로 존재한다.

화분을 키우며

해 전 아파트 앞 화단에서 다육이 화분을 발견했다. 중간정도 크기의 화분에 잎이 넓은 식물이 심겨 있었다. 음에는 '죽은 거겠지.' 하며 지나쳤는데, 자세히 보니 짙은 초록빛이 싱싱하게 살아있었다. 서리가 내려도 그 자리에 오랫동안 있었고, 깨져있는 화분하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버려진 것 같았. 이대로 두면 얼어 죽을 것 같아 집으로 데려와 분갈이부터 해주었다. 볕이 잘 드는 자리에 두고 때맞춰 물과 사랑을 주며 정성으로 키웠더니 지금은 위로, 옆으로 쑥쑥 자라 화분 세 개로 식구가 늘었.


넓적한 이파리를 따라 몽글몽글한 알갱이들이 붙어있는 신기한 화초를 보며 '이렇게 잘 자라는 건강한 애였는데, 그때 거기서 얼어 죽었으면 어쩔 뻔했나.' 싶었다. 말 못 하는 식물이어도 포기를 모르던 녀석이었다.


하늘 아래 하찮은 생명은 없다. 버려진 화분을 키우며 나는 식물의 강인한 생명력과 초록빛 작은 화분이 주는 기쁨을 오롯이 만끽하고 있다.

 



결혼 후 신혼집에 들인 공식적인 첫 화분은 작년 가을 남편이 가져온 동양란이다. 상사가 영전을 하면서 난이 많이 들어왔다고 직원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줬다고 한다. 남편은 난초에 달린 리본 문구를 보고 우리의 추억이 담긴 속초에서 온 화분을 골라서 가져왔다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렇게 큰 화분은 처음인지라 나는 자칭타칭 '꽃 전문가'인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는 동양란은 키우기 어려워서 본인도 몇 번 실패했었다며 물 조절을 잘해야 하고, 통풍이 잘 되는 곳에 두면 좋을 거라고 이야기해 주셨다.

우리 집은 확장형 구조로 베란다가 따로 없었기 때문에 거실장 한쪽을 치우고 화분의 자리를 마련했다.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볼 때면 그 옆으로 슬쩍슬쩍 초록을 볼  있어 생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나는 화분의 이름을 '초록이'라고 짓고 "록이야~ 록이야~" 하고 부르며 매일 인사를 건넸다.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열면서, 청소기를 돌리며 집안 구석구석을 다닐 때도, 한 달에 두 번 '저면관수'라는 방법으로 물을 줄 때도. 애정 어린 눈빛과 따뜻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오늘은 날이 덥지? 지치지 말고 쑥쑥 자라라."

"목말랐지? 언니가 여행 갔다 와서 물 주는 게 조금 늦었다. 미안해~"

보름 간격으로 날짜를 정해 물을 주었고, 골고루 해를 볼 수 있게 생각날 때마다 화분을 돌려주었다.


무더웠던 어느 여름날. 우연히 눈이 마주친 난초 화분에서 꽃대가 올라오고 있음을 발견했다. 여리고 가느다란 연둣빛 가지가 올라오더니 금세 네 송이의 꽃망울이 맺혔다. 그리고 매일 조금씩 꽃망울이 터지더니 이내 아름답고 고혹적인 자태를 뽐냈다. 향기는 얼마나 은은하고 그윽한지 거실 가득 향긋한 꽃내음이 가득했다. 자그마한 화분 하나가 뿜어내는 존재감이란 실로 대단했던 것이다.


동양란은  꽃을 보기가 힘들다는데, 집에 온 지 6개월 만에 도합 일곱 송이의 꽃이 핀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날이 더운데 묵묵히 제 할 일을 다하는 난초를 보며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물을 주고 이따금씩 이름을 불러주었을 뿐인데, 홀로 푸르게 빛나더니 값진 열매를 보여주고 있었다. 


기특한 우리 초록이는 지금도 일곱 송이의 꽃망울을 올리고 있다. 꽃은 차례차례 피어나 여름처럼 일곱이 되었고, 백설공주의 일곱 난쟁이처럼 작고 앙증맞은 매력을 발산 중이다.

색이 화려하지도 않고 진한 향기도 아니지만 1년에 두 번이나 귀한 광경선물해 준 화분에게 고마운 마음뿐이다.

 



첫 재발을 겪었을 때 나는 무섭도록 소유에 집착했다. 그 대상은 나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들 중에 간직하고 싶은 것들을 추려 모조리 인화했는데, 얼마 전 집 정리를 하면서 앨범을 세어 보니 (무려) 여덟 권이나 되었다. 친구들에게도 '우정 사진'을 찍자고 제안해 스튜디오를 예약하고, 옷을 맞춰 입고 수 백장의 사진을 남기기도 했다.


나는 왜 그렇게 행복한 순간들이 담긴 사진에 목을 맸을까. 항암을 시작하면 머리를 깎고, 퉁퉁 부은 모습으로 변할 테니 아프기 전 모습을 간직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른다는 마음에 조금이라도 더 나의 흔적들을 남겨놓고 싶어서였을까.


중요한 사실은 사진을 꽂을 때를 제외하고는 그 앨범을 열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차마 버리거나 정리를 하지도 못했다.

최근 이사 준비를 하며 오랜만에 사진첩을 꺼내보았다. 다시 아프기 전 이십 대의 모든 중요한 순간들이 담겨있었다. 동호회 활동, 성당 활동, 여행지에서의 사진, 친구들과 찍은 사진, 가족사진 등 앳되고 상기된 표정의 내 모습이 보였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애틋한 날들을 추억할 수 있어 새롭고 좋았다.    




반면 이런 일화도 있다. 누군가는 '소비'를 하며 존재를 확인하다고 하는데, 나는 막상 치료가 시작되면 지갑을 닫아버리는 편이었다. 호르몬치료 등 약의 부작용으로 몸이 붓고 살이 찌면서 원래 입고 다니던 옷들이 다 작아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늘어난 치수에 맞춰 다시 옷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불어난 사이즈의 옷을 구입하면 치료 중인 지금의 삶에 내 인생이 맞춰질 것만 같았다. 아프지 않았던 원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컸기에 치료 내내 새 옷 한 벌 사지 않고, 쭉쭉 늘어나는 운동복만 입으며 지냈다.


돌아보니 쓸데없는 고집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너무 많은 것을 남기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있었다.

소유하고 싶은 욕망과 뒷정리를 생각해야 하는 삶. 그 어딘가애매하게 걸려있는 나였다.    




요즘의 나는 필요한 건 사고, 사용하지 않는 것은 과감히 처분한다. 새롭게 중고거래 플랫폼에 가입을 해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고, 이동이 잦은 남편의 직장 때문에 애매한 물건들은 애당초 구입하지 않는다.

꼭 필요한 것들로만 채우고, 알맞게 소유하. 병의 유무와 상관없이 지속해야 할 삶의 모습이 아닐까.


값비싼 옷과 보석보다 나를 자주 웃게 한 것은 거실 한쪽에 놓은 작은 화분이었고, 삶의 고난이 찾아왔을 때 가장 먼저 붙잡고 싶었던 건 반짝이는 과거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이었다.


법정스님은 난초를 통해 '무소유'의 의미를 터득했다고 하는데, 나는 화분을 키우고 앨범을 정리하며 소유의 기쁨을 알아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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