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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log Nov 12. 2024

<젊은 ADHD의 슬픔>을 읽고

이토록 유쾌한 투병기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를 통해 발행된 책들 중 내가 유일하게 완독 하다 못해 직접 구매하고, 작가의 북토크까지 참석한 작품. 바로 제8회 브런치북 대상 수상작인 정지음 작가의 <젊은 ADHD의 슬픔>이다.

 

책 겉면을 감싸고 있는 띠지에는 '눈물 나게 애잔하고 슬픔 틈 없이 유쾌한 성인 ADHD의 삶'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정말 그랬다. 브런치 홈페이지를 통해 그녀의 글을 읽었을 때, 관심도 없던 ADHD의 세계에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찰떡같은 비유와 상큼한 문장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통 책 한 권을 읽으면 좋은 문장들은 포스트잇으로 표시해 두었다가 필사하는데, 정지음 작가의 책은 재미있고 신한 표현들이 많아서 종이를 붙이는 것을 포기하고 밑줄 그으며 읽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 세상은 양쪽으로 봐야 좀 더 재미있는 곳이다. 자꾸 깜빡깜빡 잊고, 아주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잊어버리는 내가 예전에는 싫었다. 하지만 이제는 망각이 신이 주신 선물이고, 나는 남들보다 좀 더 많은 선물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든 것 없이 가벼운 인생'은 관점을 바꾸자 '잊음으로써 가뿐해지는 인생'이 되었다. 나는 계속 사사로이 절망스럽겠지만, 그것들이 지속되지 않기에 결국은 행복해질 것이다. (p.19)

*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뭔지 모르겠다. 나는 도미노처럼 살고 싶다. 그런데 흩어놓은 퍼즐처럼 산다. 나도 나를 못 맞춘다. (p.190)

* 만약 이 글을 보는 누군가가 ADHD이거나 다른 문제가 있어서 헤매는 중이라면, 본인의 능력이나 작업 과정보다 목표치를 바꿔 보는 건 어떨까 싶다. 그냥 완벽해지는 것보단 모자라다는 면에서 완벽해지는 게 훨씬 쉽다. 모자람은 꽤 괜찮은 친구다. 나를 거장으로 만들어 주진 못해도 거장이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아마추어로는 만들어 주니 말이다. (p.195)



정신적 질환에 관련된 일종의 투병기였지만 우울함이나 무거움 대신 그 병을 겪지 않은 사람들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나 역시 이 책을 통해 성인 ADHD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되었고,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민음사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그녀의 인터뷰 영상을 정주행 했고, SNS를 팔로우하며 남몰래 팬심을 키워갔다.


그런 그녀가 우리 동네 구립도서관에 북토크를 한다는 포스터를 보았다. 나는 곧바로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강좌를 신청하고 그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직접 구입한 책을 보물같이 끌어안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심장이 콩닥하고 뛰었다. 좋아하는 연예인의 팬미팅에 갈 때도 이런 느낌은 아니었는, 동경하는 작가님과의 오붓한 시간이라니! 


7시 정각에 맞추어 강연은 시작되었다. 주최 측에서 마련해 주신 다과도 선물로 받았다. 나는 그녀와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정면 세 번째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앞에 누가 앉으면 시야가 가릴 새라 노심초사하기도 했다.

간 도서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또한 읽었기 때문에 그녀가 하는 이야기에 집중할  있었다. 강의 후 질의응답 시간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번쩍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

 

"오늘 강연 재밌게 잘 들었습니다. 저는 작가님의 첫 작품인 <젊은 ADHD의 슬픔>이라는 책을 좋아하는데요, 자칫 어렵거나 무거운 소재로 다가올 수 도 있는 이야기를 어떻게 소재로 선택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렇게 유쾌하게 풀어낼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꼭 묻고 싶었다. 나 역시 내가 겪은 이야기들을 글로 적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먼저 스스로 슬퍼지거나 우울해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더구나 평범하게 직장생활과 육아, 살림을 하면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암 투병기'를 다룬 글은 너무 무겁고 비장하게 느껴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나는 자꾸 아팠지만 자주 행복했다. 이 복합적이고 오묘한 감정들을 어떻게 풀어내야 지, 글 쓰기에 괜찮은 소재가 맞는 것인지대해 확신이 아직 없었다.


작가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 책을 쓸 당시 저는 평생 동안 저를 괴롭힌 ADHD에 대해 상당히 많이 화가 나 있는 상태였어요. 분노했죠. 내가 너 때문에 이렇게 힘들었는데, 이제 너도 나에게 무언가를 해줄 때가 되지 않았어? 하고 말이에요. 일종의 보상심리 같은 거였어요."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순간 그녀의 대답을 곱씹었다. 가로등 불빛을 지나며, 아파트 상가 앞에서, 현관 비밀 번호를 누르는 순도.


생각해 보면 나는 한 번도 '암'에게 무언가를 바란 적이 없었다. '내 인생에서 썩 꺼져줄래?', '그를 모르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가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떼어놓고 살 수 없다면, 그녀의 말처럼 나도 내가 경험한 일을 토대로 새로운 무언가에 도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비로소 암환자로 세상 밖에 나갈 용기를 장착했다. 아픈 걸 비밀로 하지는 않았지만 공식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고 글을 통해 나의 삶을 공개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후 나는  한화생명이 후원하고 (주)박피디와 황배우가 주관한 '스쿨 오브 히어로즈' 프로그램에 지원하여 다양한 활동을 했고, 올해 하반기부터 브런치 채널을 통해 나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어떤 분들은 암 투병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것을 '암밍아웃'이라고 표현한다. 암밍아웃이 망설여졌던 것은, 오랜 경험상 이 이야기를 하였을 때 나에게 플러스(+)적인 요소로 돌아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목숨이 걸린 중대한 일이었지만, 한 다리만 건너면 가벼운 가십거리에 불과했고 나쁜 소문에는 날개가 달렸는지 어김없이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

유튜브나 각종 SNS를 통해 암환자의 일상을 기록하는 영상들 속에서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있냐, 암환자면 환자답게 누워있어야지 해외여행은 왜 가냐, 그런 거 먹으면 안 된다, 저런 거 하면 안 된다, 암환자 맞긴 한거냐, 서류 떼서 증명해 봐라..." 등의 상식 이하의 댓글들을 보며 '병은 알려야 낫는다'는 것도 옛말이지, 되도록 공개하지 말고 조용히 지내는 게 답이지 싶었다.

 

그런데 나도 한 뼘 정도의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암시키 이놈! 내가 당한 게 얼만데, 너도 이제 나를 위해서 뭔가를 해줄 때가 되고도 남았지? 안 그래?'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나의 투병기도 그녀의 글처럼 유쾌하고 명랑하게 채워진다면 좋겠다. 약 냄새가 나지 않고 울렁거리지 않는 글이어야 할 텐데, 남편이 읽고 계속 '먹먹하다'고 한다. 그래, 뭐 '먹먹' 까지는 수용하기로 했다.

다만 슬픔과 비탄으로 점철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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