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수가 토크쇼에 나와서 이야기는 하는 것을 보았다.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대표곡 몇 곡과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에도 소신 발언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 정도였다. 그런 그가 아내와의 사랑이야기를 묻는 사회자의 말에 화색을 띤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한눈에 봐도 아내를 많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내의 모습이었다.
가수 신해철.
록 밴드 N.EX.T의 리더이자 메인 보컬로 '마왕'이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신해철과 그의 부인은 첫눈에 반해 연애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아내분이 림프암 판정을 받게 되었고, 병원에 함께 다니면서 '남친'과 '남편'은 한 글자 차이지만 보호하는 데 있어서 천지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녀를 지키기 위해 신해철은 결혼을 결심했고, 몇 년 후 아내의 암 재발로 또다시 투병했을 때에도 변함없이 곁에 있었다.
신해철은 아내가 수술장에 들어갈 때면 넥타이에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고 인사한다고 했다. 혹시나 그 모습이 그녀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 될까 봐 가장 멋지고 근사한 모습으로 배웅하는 것이라고.
나 역시 암을 경험한 사람으로 이런 남자를 만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아직 지금의 남편과 교제하기 전으로미혼의 암환자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연애나 결혼이 막막하기만 했다. 그 후로 나는 신해철의 열렬한 팬이 되었고, 오래전 발매된 그의 노래들을 찾아 듣곤 했다.
그렇게 알게 된 곡이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라는 노래였다. 그의 가사들은 흔한 사랑노래라기보다 철학적이고, 지친 삶에 위안을 주는 곡들이 많다. 특히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라는 곡은 병원에 입원했을 때 가장 많이 듣고 불렀던 곡이다.
입원기간 동안 하루종일 답답한 병실을 지키고 있는 일은 정말어려운 일이었다. 햇살과 바람, 때로는 거리의 소음들이 그리워 옥상정원을 자주 찾았는데, 엄마와 이어폰 하나를 나눠 끼고 신해철의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를 들었다.
"그런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나는 포기하지 않아요. 그대도 우리 둘의 만남에 후횐 없겠죠. 어렵고 또 험한 길을 걸어도 나는 그대를 사랑해요."
듣다가 듣다가 노래도 불러보고, 분위기에 취해서였는지 양손을 머리 위로 흔들며 콘서트에 온 것처럼 열창했다. 병원에서 보이는 창경궁 너머로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노래를 더 불렀을까. 경비아저씨가 조심스레 다가오더니 '출입문을 잠가야 한다'며 이제 나가달라고 했다. 엄마와 나는 부끄러움과 아쉬움을 뒤로하고 후다닥 병실로 돌아왔다.
요즘도 가끔 그 곡을 들을 때면 노을 진 병원 옥상에서 환자복 차림으로 신해철의 노래를 부르던 우리 모습이 떠오른다. 그토록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그는 허망하게 먼저 갔지만 그가 남긴 노래와 음반들은 우리 곁에 남아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있다.
또 하나 소개하고 싶은 노래는<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라는 곡이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질문은 지워지지 않네. 우린 그 무엇을 찾아 이 세상에 왔을까.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홀로 걸어가네.
세월이 흘러가고 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 누군가 그대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나.
지나간 세월에 후회는 없노라고. 그대여."
나는 무엇을 찾아 세상에 왔고, 내가 살아온 세월에 후회는 없을까. 사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생각을 비우고 싶다는 마음에 이렇게 무게 있는 질문들은 스스로에게 잘 건네지 않았던 것 같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이 노래를 들으며 한동안 우두커니가 되었다.
낮고 잔잔한 그의 목소리는 유난히 가을과 잘 어울린다.
더 이상 슬픈 표정 하는 사람도 없고, 지나간 순간에 후회하는 이들도 없었으면 좋겠다.
어렵고 험한 길 위에서도 사랑은 피어나고,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다 살아낸다면 꼭 정답을 찾지 못해도 충분히 의미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