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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log Oct 15. 2024

누구나 아플 수 있다

총량의 법칙

암환자가 되고 생긴 작은 바람이 있다. 먼 훗날 언젠가 지인들이 병과 마주하는 일이 생긴다면 먼저 겪어본 사람으로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다. 비록 잦은 투병으로 그들이 나이가 드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내가 먼저 갈 것 같다는 걱정에 사로잡히기도 했지만.


이른 나이에 겪은 암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기도 했다. 또래 중 누구도 내 이야기에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그들은 너무도 건강했으며, '암'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무엇보다 20년 전 대중 매체에 등장하는 암환자들은 두건을 쓴 새까만 얼굴에 자주 구토를 했으며 결국에는 죽고 말았기 때문에 대부분 나의 일을 어려워했고, 두려워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친구들이 결혼을 하고, 나이를 먹고, 아이를 기르는 엄마가 되었을 때 확실히 전보다 병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게 편해졌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자주 연락하는 선배가 있었다. 언니는 사는 이야기, 사업 이야기, 가족 이야기 등 여러 가지 고민들을 털어놓곤 했는데, 꼭 마지막에 전화를 끊으면서 하는 말이

"에휴. 그래, 너도 있는데."

였다. 한두 번 그런 소리를 듣고 나니까 통화가 끝난 후에는 늘 묘한 불편함이 남았다.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저 '언니 지금  힘들어서 그렇겠지.' 하고 넘어가곤 했다.


그런데 몇 달 전 그 선배가 유방암을 진단받았다고 연락이 왔다. 처음에는 0기여서 수술만 하면 끝난다고 했었는데, 실제로 열어보니 침윤도 있고 범위가 넓어 수술이 커지고 항암치료가 불가피하게 되었다고 했다. 늘 씩씩한 선배였는데 통화를 하거나 문병을 가면 이야기 도중에 불쑥불쑥 울음을 터트리는 모습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도움을 주고 싶었다. 우선 유방암과 관련된 책들, 투병 기간에 도움이 되었던 도서와 영양제를 선물했고, 알찬 정보를 제공하는 유튜브 채널도 계속 공유하고 있다. 신앙이 같다 보니 힘들 때 보면 좋은 기도문과 묵주와 성물도 보냈다. 무엇보다 혼자 생활하는 언니가 마음이 산란하거나 힘든 날 편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뾰족한 수는 없어도 이 과정을 다 아는 사람과 이야기하면 공감이 클뿐더러 미약하나마 심적 안정에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치료를 앞두고 걱정이 많은 하는 언니에게

"걱정할 시간에 기도하라."

고 이야기했는데, 언니는 그 말이 꽤 인상적이었는지 프로필 사진으로 올려두기도 했다.


걱정과 불안, 염려와 두려움은 사실 노력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이 바싹바싹 타들어가고 피 말리는 시간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하지만 그 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내가 깨달은 한 가지는 '걱정'은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이다. 그 시간에 차라리 좋은 생각을 한 번이라도 더 하는 게 훨씬 큰 도움이 된다.


선배는 요즘 화할 때면 항상

"너는 어떻게 이걸 몇 번이나 했냐. 너 진짜 대단하다. 정말 기적인 거다."라고 말한다.

암에 걸린 나 자신이 항상 작고 초라하게만 느꼈었는데, 완치는 아니지만 재발을 이겨내고 지금까지 암 생존자로 잘 살고 있으니 이런 이야기도 듣는다.




몸이 아닌 마음이 아픈 경우도 있다. 이혼으로 힘들어하는 친구가 있었다. 갑작스러운 이혼은 그녀의 삶을 크게 흔들어놨고, 다시 마음을 추스리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누군가의 슬픔에 곁에서 손잡아주고, 귀 기울여 들어줄 수는 있었지만 고통을 견디는 것은 오롯이 본인의 몫이었다. 어느 날 친구에게서 장문의 문자가다.


<이나야, 나도 이렇게 힘든데 그  세월 동안 네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이런 시련이 왔을 때 너는 무얼 하면서 어떻게 견뎠니? 너무 답답해서 보낸다.>


우리는 인생에서 불쑥 고난과 마주했을 길을 잃고 방황을 하며 때론 무너지기도 한다. 어디서부터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면서 '다 지나간다'는 말을 붙들고 기다린다. 나도 그랬다. 치료가 끝나 조금 살만하면 다시 수술을 하고, 또 괜찮다 싶으면 다시 입원과 치료를 반복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 긴 긴 시간들을 어떻게 보냈는지 아득하기만 하다. 나는 오랜 고민 끝에 친구에게 답장을 보냈다.


<친구야, 많이 힘들지. 나는 힘들었을 때 누군가 만나서 이야기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고, 책을 읽거나 조용히 기도하는 것도 도움이 됐어. 산이나 바다같이 자연이 좋은 곳에 가면 마음이 편해지기도 하더라. 재미있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최대한 생각을 비우려고 했고, 힘들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만 있으면 더 축축 늘어져서 일부러 씻고 집 앞 공원이라도 나가 앉아있었어. 햇빛 받는 게 실제로도 좋다고 하더라고.  

지금은 힘들겠지만 일 년 뒤, 이년 뒤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웃고 있을 거야. 슬픈 마음이 다 지나갈 때까지 충분히 모두 흘려보내자. 늘 응원한다.>   




힘든 일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살다 보면 슬픈 드라마의 주인공이 내가 되는 경우가 분명히 생긴다. 그럴 때 이 시를 읽어본다면 좋겠다.

 

아무리 어두운 길이라도

나 이전에 누군가는 이 길을 지나갔을 것이고,


아무리 가파른 길이라도

나 이전에 누군가는 이 길을 통과했을 것이다.


아무도 걸어가 본 적이 없는 그런 길은 없다.


나의 어두운 시기가 비슷한 여행을 하는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기를.


- 베드로 시안 <그런 길은 없다>


나 혼자 속절없이 슬퍼하고 있을 때에도 이미 그 길을 걸어간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며 찾아보면 주변에 손 내밀어 주고 귀 기울여줄 누군가가 (무언가가) 반드시 존재한다. 


흔들리되 부러지지 말고, 쓰러지되 무너지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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