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친구

<지란지교를 꿈꾸며> / 유안진

by 윤슬log Feb 0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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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이야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 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으랴.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영원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물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은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때론 약간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히 맞짱을 쳐주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지나 내가 평온해 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진 않다. 많은 사람과 사귀기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계속되길 바란다.
나는 때때로 맛있는 것을 내가 더 먹고 싶을 테고 내가 더 예뻐 보이기를 바라겠지만 금방 그 마음을 지울 줄도 알 것이다.
때로는 얼음 풀리는 냇물이나 가을 갈대숲 기러기 울음을 친구보다 더 좋아할 수 있겠으나 결국은 우정을 제일로 여길 것이다.

우리는 흰 눈 속 침대 같은 기상을 지녔으나 들꽃처럼 나약할 수도 있고, 아첨 같은 양보는 싫지만 이따금 밑지며 사는 아량을 갖기를 바란다.
우리가 항상 지혜롭지 못하더라도 곤란을 벗어나려고 진실일지라도 타인을 팔지 않을 것이다. 오해받더라도 묵묵할 수 있는 어리석음과 배짱을 지니기를 바란다. 우리의 외모가 아름답진 않다 해도, 우리의 향기만은 아름답게 지니리라.
우리에겐 다시 젊어질 수 있는 추억이 있으나 늙는 일에 초조하지 않을 웃음도 만들어 낼 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사랑하되 헤프진 않게 냉면을 먹을 때는 농부처럼 먹을 줄 알며, 스테이크를 자를 때는 여왕처럼 품의 있게 군밤을 아이처럼 까먹고 차를 마실 때는 백자보다 우아해지리라.
우리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며, 특별히 한두 사람을 사랑한다 하여 많은 사람을 싫어하지 않으리라. 우리의 손이 비록 작고 여리나 서로 버티어주는 기둥이 될 것이며, 서로를 살펴주는 불빛이 되리라.

- 유안진 <지란지교를 꿈꾸며> 중

살면서 휴대폰, 지갑, 가방 등을 분실 한 경험이 한 번도 없다. 꼼꼼하게 챙기고 잘 확인하는 덕분이다. 하지만 물건과는 다르게 소중한 인연으로 닿았던 사람들은 세심하게 배려하고 마음을 쓰더라도 시절이나 상황에 따라 가깝고 멀어지며 때론 영영 잃어버리기도 한다.

필사 노트에 적은 <지란지교를 꿈꾸며>는 담박하고 정감 어린 문체가 돋보이는 글로 쓰는 내내 은은한 미소를 띠게 했던 작품이다.

나에게도 고향 같은 친구가 있었다. 초등학교 때 같은 반으로 처음 만나 중학교 1학년 동기로 한번 더 인연을 맺게 된 '김명선'이라는 친구다. 인생의 절반에 접어드니 누군가의 기쁜 일에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슬픈 일이 있어도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친구가 참 고맙고 귀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명선은 그랬다. 어릴 때 만난 친구였지만 그녀는 한결같이 나의 기쁜 일에는 앞장서 축하해 주었고, 힘든 일에는 요란하지 않은 위로를 건넬 줄 아는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문학소녀였던 나는 한 대학교에서 주최하는 전국 고교생 백일장에 참가해 수상한 적이 있다. 부상으로 주어지는 문화상품권과 당시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윤후명, 문정희, 신경림 작가의 책 10권을 들고 명선을 만났다. 기쁜 소식을 가족에게 제일 먼저 전달하고 전화한 친구가 명선이었다. 쇼핑백도 없이 두 손 가득 책을 들고 온 나를 맞이하며 그녀는 함박 미소에 담아 축하를 건넸다. 어느 상가 앞 계단에 앉아 명선이 했던 말이 기억이 난다.

"나는 참 좋아. 내 친구 OO이는 그림을 잘 그리고 너는 글을 잘 쓰잖아. 나는 이런 친구들이 있어서 정말 기뻐."

명선은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재능이 있는 친구를 둬서 좋다는 말. 친구가 잘 돼서 좋다는 말. 고작 십 대였지만 그녀가 나에게 건넨 그 말은 지금 들어도 참 신선하다. 나에게 좋은 사람이어서 누군가가 좋았던 적은 있어도 멋지고 훌륭한 친구들을 둔 덕분에 내가 좋다는 말은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명선은 내가 암투병을 했을 때에도 한결같았다. 만 스무 살. 친구들은 '암'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내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이 퍼지자 자주 보던 친구 중 한 명은 연락을 끊었고, 대다수는 나를 대하기를 어려워했으며 암에 대해 무지했다. 암은 곧 죽을병이라는 생각이 사회 전체에 (지금보다도 더) 만연한 시절이었고, 나처럼 어리고 젊은 나이에 암에 걸린 경우는 드물었다.

학교를 휴학하고 본격적으로 항암 치료를 시작하기 전 명선이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불쑥 핑크색 도자기로 된 돼지 저금통을 내밀었다. 뭐냐고 물으니 편지를 써 쪽지처럼 접어 넣어놨으니 심심할 때마다 하나씩 꺼내 보라고 했다. 그런 선물은 처음이라 일단 가지고 집으로 왔다. 고무마개를 열어 돼지 저금통을 흔들었더니 작은 글씨로 친구가 눌러쓴 쪽지들이 꽃잎처럼 포르르 떨어졌다. 스무 개 남짓 되는 편지들이었다.

'날이 많이 풀리긴 했지만 꽃샘추위가 심할 거야. 외출할 때 장갑 꼭 끼고 감기 조심해.'

'오늘은 따뜻한 차 한잔 마셔보는 건 어때? 컨디션이 좋았으면 좋겠다. 어제 보다 나아질 거야. 파이팅!'

등 간략한 내용이었지만 반짝하고 기운을 낼 수 있는 따뜻한 말들이 담겨있었다.

항암 치료 중에 잠시 만났을 때도 명선은

"잠시 여기 좀 들렀다 가자."

며 꽃집으로 나를 이끌었다. 하얀 화분에 담긴 싱싱한 식물을 사서 내 손에 쥐어준 친구는 말을 이어갔다.

"이렇게 생명력 있는 식물을 가까이 두고 보면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고. 너도 분명히 이 꽃처럼 다시 건강해질 거야."

병문안을 오고 용기를 주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명선이 건네는 위로는 차원이 다른 특별함이 있었다. 우린 겨우 스무 살이었다. 그런 배려와 따뜻함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명선이가 있어서 참 든든했다.

그녀에게 제일 고마웠던 점은 나와 내 상황을 생각하는 깊은 마음씨였다. 하루는 집으로 소포가 배달되었다. '보그 잡지'와 부록이 담긴 택배였다. 명선이 긴 항암 치료 기간 동안 야외 활동이 제한된다는 것을 알고 패션지를 정기구독 해 보내온 것이다.

화려하고 비싼 옷들, 명사의 인터뷰, 화장품과 액세서리, 인테리어 소품 등등 당시 대학생들이 한참 관심이 많을 분야들로 꽉꽉 채워진 패션지는 들추기만 하면 별천지 같은 세계로 나를 이끌었다. 오래 보고 묵상을 하는 책은 아니었지만 감각적인 색채와 트렌디한 이모저모를 익히기에 딱 좋았다. 어차피 항암 주사를 맞고 나면 여러 가지 부작용으로 글씨가 빼곡한 어려운 책은 읽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당시 나에게는 '북 테라피'나 다름없었다.

명선이 보내 준 1년 구독이 끝나고 나는 내 돈으로 1년 더 연장해 잡지를 받아 보았다. 흥미로운 정보들과 대학 생활, 사회생활을 위한 팁 그리고 뷰티, 맛집, 여행 등에 대한 유익한 정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힘든 상황에 있는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주고, 밥을 사주고 필요한 선물을 해 준 적은 있지만 나에게 베푼 명선의 마음은 때론 애인에게 주는 러브장과 같이 정성 담긴 선물로, 때로는 꽃처럼 다시 활짝 피어날 거라는 생명력 넘치는 식물로 나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다. 무엇보다 한 달에 한 번 잡지와 선물이 도착하는 날을 기다리며 길고 힘들었던 일 년을 금방 보낼 수 있었다. 명선은 늘 '지금 이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할까? 무엇이 좋을까?'를 진심으로 고민하고 행하는 느낌이었다.

가끔 내가 생각하는 수준 이상으로 배려를 해주는 사람들을 볼 때면 고마움과 동시에 부끄러움을 들곤 한다. '나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못했는데...' 하는 마음에서다. 사람은 다르고 또 다양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한다는 정답은 없지만 그래도 명선이가 내 친구여서, 그때 옆에 있어줘서 기쁘고 고마운 날들이었다.

견고했던 우정도 시간이 흘러 추억으로 남았다. 나는 학교로 복학을 했고 명선도 인근의 다른 대학에서 수학 중이었다.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종종 만나고 전화로 통화를 나누었지만 그녀가 대학 졸업 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연락이 힘들어졌다. 그 당시에는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이었고 카카오톡이나 영상 통화도 없었다. 가끔 싸이월드에 글을 남겨 안부를 물었지만 드문 드문 답이 왔을 뿐 지금은 영영 소식이 끊어졌다.

'시절 인연' 이야 살면서 무수히 많겠지만 흘러간 인연들 중에서 꼭 다시 만나고 싶은 친구 명선.

솜털 가득할 때 만나 처음으로 본 일본 만화, J-POP과 같은 다른 나라의 문화를 알려준 것도 너였고, 화장품이나 화장하는 법을 알려준 것도 너였다. 중간고사가 끝나면 명동으로 나가 일없이 길거리를 쏘다니면서도 행복했던 것도 너와 함께라서였다.

시기, 질투, 오해와 사고, 서로의 상황이 달라지고 환경의 차이로 인해 멀어진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처럼 오래 못 보고 살 수도 있구나. 떨어져 살아온 시간만큼 서로 많이 달라졌겠지만 그래도 오래된 친구와 다시 만났을 때 느낄 수 있는 풋풋한 감정들을 너와 함께 느끼고 싶은데. 그 시절 너에게 나도 충분히 좋은 친구였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