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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보통의 존재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 김수현

by 윤슬log Feb 1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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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모든 것을 숫자로 측정할 수 있을까?
아이큐가 지혜를 측정할 수 없고, 친구의 숫자가 관계의 깊이를 증명할 수 없으며, 집의 평수가 가족의 화목함을 보장할 수 없고, 연봉이 그 사람의 인격을 대변할 수 없다.      
진정한 가치는 숫자로 측정되지 않는다.
그러니 만약 당신이 우월한 존재가 아닌 비교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싶다면 가장 먼저 삶에서 숫자를 지워야 할 것이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숫자가 담을 수 없는 것들에 있다.   

 ◉ 만약 당신도 여러 번의 실패를 경험했다면 그만큼 잘 어울리는 옷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는 의미다.
그러니 이제 실패를 통해 길러낸 안목과 취향으로 내게 가장 좋은 한 가지를 찾아내자.
삶이란 결국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질 좋은 옷 한 벌을 찾는 일이다.

- 김수현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중





김수현 작가의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라는 책은 내가 지인들에게 가장 많이 선물했던 책이다. 아기자기한 일러스트와 촌철살인의 멘트로 갇혀있던 생각의 틀을 확장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가볍고 산뜻하게 읽을 수 있지만 책을 덮고 난 후에는 묵직함을 남기는 결코 가볍지 않은 책이라고나 할까.

 

 속에는 흥미로운 글귀가 있었다. 인터넷에 떠돌던 '나라별 중산층의 기준'을 제시해 둔 페이지였다.



* 영국
(옥스포드대에서 제시한 중산층의 조건)
- 페어플레이를 할 것
-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질 것
- 나만의 독선을 지니지 말 것
-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대응할 것
- 불의, 불평, 불법에 의연히 대처할 것

* 프랑스
- 외국어를 하나 정도 구사하여 폭넓은 세계 경험을 갖출 것
- 한 가지 이상의 스포츠를 즐기거나 하나 이상의 악기를 다룰 것
- 남들과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별미 하나 정도는 만들어 손님을 대접할 것
- 사회봉사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할 것
- 남의 아이를 내 아이처럼 꾸짖을 수 있을 것

* 대한민국
(연봉 정보 사이트 직장인 대상 설문)
- 부채 없는 아파트 30평대
- 월 급여 500만 원 이상
- 자동차는 2,000CC급 중형차
- 예금액 잔고 1억 원 이상
- 해외여행은 1년에 몇 번



 뒤에 내가 옮겨 적은 '삶의 모든 것을 숫자로 측정할 수 있을까?'로 시작하는 문단이 이어진다. 영국, 프랑스와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 기준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 바로 숫자다.

우리나라에서 생각하는 중산층의 기준은 철저히 숫자로 계산되고 물질로 통용된다.

'나의 결혼 가능 점수'를 알려준다는 배너 광고 역시 나이, 키, 몸무게, 자산 액수, 연봉 등 수많은 숫자를 입력하고 나서야 나의 결혼 가능 점수를 알려준다. 무조건 크고 남들보다 우월한 숫자를 보유하고 있을 때, 나라는 인간이 어떤 사람인지와는 상관없이 우수한 상품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글을 쓰면서도 웃픈 우리나라 중산층의 기준.


사실 가끔 만나 사람과 연봉, 아파트, 예금 잔고, 어떤 자동차를 타는지 인사말처럼 나누지 않으니 오래 알거나 속속들이 아는 가까운 사이가 아니고서야 서로의 경제력을 가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에서 숫자만큼이나 강력한 것이 있다. 바로 '사회적인 기준과 잣대'다.

우리나라는 마치 정해진 과업처럼 몇 살에 대학에 들어가야 하고, 몇 살쯤에는 취업을 해서 직장 생활한 지 어느 정도 되면 이 정도 금액을 모아두어야 하고, 삼십 대 초중반에는 결혼을 해서 아이는 둘 정도 낳으면 좋고, 교통과 교육 여건이 훌륭한 곳에 똘똘한 내 집 한 채를 마련하는 게 '잘 사는 삶'인 듯 정형화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땐 나도 그다. 내 장대한 인생 계획에 '암'은 없었고 암의 '재발'은 더더욱 없었다. 졸업 후에는 이직할 필요가 없는 평생직장을 목표로 취업 재수를 했고, 정년이 보장되고 워라밸이 만족스러운 회사에 취업을 했다. 하지만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남들은 평생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암'을 이십 대 초반에 만난 것도 모자라 한창 직장생활을 하고 결혼, 출산, 육아라는 생의 절정을 살아보기도 전에 숱한 재발과 2차 암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 직장 생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차선책으로 준비하고 있던 대학원도 지방에서 요양생활을 시작하며 포기해야만 했다.


회사를 다닐 때는 가끔 소개팅을 나가면

"대학교에서 근무하세요? 교직원 처음 봐요. 일등 신붓감이시네."

라고 건네낯간지러운 칭찬의 말도 들어봤지만 불과 몇 년 사이 내 정체성은 아픈 몸으로 나이 들어가는 백수에 젊은 환자일 뿐이었다.

'나는 정녕 아프려고 태어난 사람인가?'

라는 생각이  즈음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물질과 숫자로 된 것들은 영원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통장은 메말라갔고, "어느 대학 다녀요."와 같이 "어디 회사 다녀요."라는 한 마디로 나를 수식해 주던 말들도 모두 사라졌다. 몇 년 동안 납입하던 적금도 부을 수 없었고 내 돈으로 1년에 한 번 떠났던 달콤한 해외여행도 옛날 일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회사를 그만둔 뒤 대학원을 진학을 위해 공부를 하고 있었고, 결혼 계획은 없었지만 친구의 부탁으로 부케를 받게 되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피로연장에서 우연히 만난 동창이 반색을 하며 말을 걸었다. 대학 졸업 후 십 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친구는 "잘 지냈어? 어떻게 지내?"라는 말 대신 대뜸 이 말부터 꺼냈다.

"이나야~ 너는 어느 회사 다녀?"

"나? 나 회사 다니다가 지금 교육대학원 가려고 그만뒀어."

"아~ 그렇구나. 그럼 남자친구는 있어? 아까 네가 부케 받았길래. 혹시 결혼하나 하구."

"아. 나 남자친구 없어. 그냥 언니가 부케 받아달라고 해서 받은 거야."

친구는 별 다른 말 없이 "아~" 그러더니 가방을 쏙 들고 다른 자리로 가버렸다.

뭐지 싶었지만 그 친구에게는 '어느 회사를 다니고, 남자친구와 결혼 여부가 엄청 중요하구나.' 하고 생각하고 말았다. 어쨌든 나는 그녀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대답을 하나도 하지 못했고, 친구는 몇 가지 질문을 늘어놓은 후 싱거운 듯 리를 다. 그녀가 가고 음식을 마저 데 왠지 입맛이 씁쓸한 것은 어쩔 수 다.


우리나라에서 새로운 자리, 비슷한 연령대, 특히 여자들끼리 만나는 모임에 가면 나누는 이야기가 거의 비슷하다. <이름, 나이, 회사>는 무조건이고, 여기에 친분이 조금 더해지면 남자 친구 여부, 결혼은 했는지 (결혼 계획이 있는지), 아이가 있는지, 사는 곳은 어딘지 그리고 미혼이거나 결혼을 했음에도 자녀가 없다면 어김없이 '왜'가 따라붙는다. 왜 (아직까지) 결혼을 안 했는지, 왜 아이가 없는지, 왜 하나만 낳고 둘째를 낳지 않는지...

정말 우리 사회가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이 많다면 고독사도 없고 독거노인으로 늙어가더라도 외롭지 않을 텐데. 관심보다는 '호기심'에 가까운 질문들을 나누며 그 기준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던 나는 자연스레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내가 나로 살기 어려운 세상이다. 세상이 정해 놓은 수많은 잣대에 나는 흔들리고 부유하고 방황한다. 인생을 살아가는 속도도 다르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기준도 모두 른데, 더 빨리 가지 못해 아쉽고 더 많이 가지지 못해 애쓰는 삶이 일상이 돼버렸다. 그래 가끔 슬로우 라이프를 지향하며 젊은 나이에 화려한 도시 생활을 뒤로하고 낙향하는 이들이 TV나 신문 기사로 조명되기도 한다.

지금 나의 삶은 내가 선택해서 누리는 슬로우 라이프는 아니지만 벗어나려고,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려고 부단히 노력십여 년을 지나 많이 받아들였고 내려놓는 중이다.


몸으로 태어나 빈 손으로 가는 삶은 생각처럼 대단할 것도 특별할 것도 없었다. 아무리 촘촘하게 인생 계획을 짜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행복'이 목표가 되는 순간 행복하지 않은 시간들을 그 반대로 인식하게 되는 것도 싫었다. 삶은 행복과 불행만으로 설명하기엔 너무 광범위했고 어떤 면에 있어서는 철저히 형이상학적이었다. 이렇다 할 명확한 감정의 순간보다 조금은 심심하고 다소 덤덤한 시간들로 채워지는 것이 인생인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닌 시간들은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것. 특별하고 대단하지 않더라도 오늘 하루 그럭저럭 선방하며 묵묵히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가장 보통의 존재'로 충분한 것이다.  


기억하자. 높은 숫자와 많은 물질들이 영원한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며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도 불사불멸을 누릴 수는 없다.

1등이 되지 않아도, 최고가 아니어도 괜찮다. 가장 보통의 존재로 우뚝 설 것. 풍부하기보다 풍성하게 존재할 것. 착한 사람보다 좋은 어른이 될 것. 스스로에게 다정할 것.

'삶이란 결국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질 좋은 옷 한 벌을 찾는 일'이라는 필사 노트의 마지막 문구처럼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삶의 방식을 터득해 기쁜 마음으로 살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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