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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때를 기다리며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 조앤 치티스터

by 윤슬log


◉ 삶은 곤경의 연속이다. 막다른 길에 다다라 다른 길로 방향을 바꾸려고 애를 써야 하는 상황에 자주 빠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길이 막다른 길이 아니고, 자신이 가고자 했던 길과 연결된 길임을 알게 된다.

◉ 영원히 끝나지 않는 폭풍우는 없다. 모든 비바람은 지나간다. 고난의 때에도 끝이 있다.

◉ 우리가 누구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때이기에 할 수 있는 것. 나의 때를 기다리자.

◉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부술 때가 있고 지을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
돌을 던질 때가 있고 돌을 모을 때가 있으며 껴안을 때가 있고 떨어질 때가 있다.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간직할 때가 있고 던져 버릴 때가 있다.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의 때가 있고 평화의 때가 있다.

- 조앤 치티스터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중


흔히들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말한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은 옛말로 '시절 인연'이라는 단어에 더 공감이 가는 세상이 되었다. 사랑도 인연도 살면서 일어나는 무수한 일들도 결국 '때'가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때라면 여지없이 안되고, 별다른 노력 없이도 되는 때를 만나면 쉽게 성사됐던 경험. 누구나 있지 않을까.


조앤 치티스터 수녀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라는 책은 성당 주보를 통해 알게 되었다. 신간 도서를 소개하는 페이지에서 글을 읽고 구입했는데 기대보다 훨씬 유익해서 지금도 가끔 꺼내보곤 한다.

책의 머리말은 "역경에 처해 보지 않은 사람보다 불쌍한 사람은 없다."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성서 코헬렛의 말씀을 인용해 우리 삶에 찾아오는 다양한 순간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보내야 하는지 알 수 있어 종교와 상관없이 인생의 큰 방향을 점검하고 싶을 때 일독하기 좋은 책이다.




나는 지금도 나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은 폭풍우는 없다는 말처럼. 모든 비바람은 지나가고, 고난의 때에도 끝이 있다는 책 속의 문장처럼.


부모님도 선생님도 그랬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만 가면 인생이 훨씬 편할 거라고. 순진한 모범생이었던 나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고 새내기의 기쁨을 모두 누리기도 전에 나는 암환자가 되었다. 고작 만 스무 살이었다.

그 후 한동안 늦은 밤, 주말 할 거 없이 학원과 독서실을 오가는 학생들을 볼 때면

'나도 저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갔는데 암에 걸렸네...?'

하는 생각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씩씩하게 치료받고 복귀하면 괜찮을 줄 알았다. 취업 후 직장에서 막 자리를 잡아갈 때 즈음 재발이 되었고, 병가 휴직을 내고 수술, 방사선, 항암치료를 했지만 복직을 앞둔 시점에 반대쪽 가슴에 다시 암이 생겨 결국 그만둬야 했다. 그 후 몇 차례 더 이어진 유방암의 재발과 폐에 생긴 새로운 암으로 나는 내가 꿈꾸던 삶과는 조금 다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한 두 번 아팠던 게 아니라 이런 가정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만약 내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무난히 대학을 졸업하고, 정년이 보장되는 직장에서 안정적인 회사 생활을 하고 있었겠지. 결혼을 빨리하고 싶어 했으니 적어도 삼십 대 초반쯤에는 결혼을 해서 두 명의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지 않았을까. 물론 육아휴직도 야무지게 쓰는 것도 꼭 해보고 싶은 일 중 하나였다. 내 주변의 모든 이들처럼 직장 생활로 고민하고, 육아와 살림에 치이면서 바쁘고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 같았다.

사실 나의 꿈은 남들보다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이었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그게 참 어려운 일이구나'를 느낄 때마다 인생이 어렵다고만 생각됐다.


힘든 순간에는

'언젠간 나의 때도 올 거라고. 내 인생 마흔부터'

라고 되뇌며 정신줄을 붙잡았다.

'늦게 피는 꽃, 흔들리며 피는 꽃 심지어는 진흙 속에서 피는 꽃도 있다'

고 스스로에게 위로도 건넸다. 꼭 모든 사람이 '꽃'일 필요는 없으니 나의 인생은 어디 길가에 핀 이름 모를 들풀이나 밟아도 밟아도 일어나는 질긴 생명력의 잡초여도 좋으니 '끝나지만 말았으면' 하고 생각했다.




얼마 전 두통이 너무 심해져 마사지를 받으러 간 적이 있다. 다니던 병원의 신경과 검사를 잡자니 대기가 너무 길었고 예약을 위한 전화 연결조차 어려웠다. 무엇보다 이사를 앞두고 있던 시점이라 큰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두 달 뒤면 정기 검진 일정이 잡혀있었기 때문에 큰 병원에 가는 대신 지금 할 수 있는 다른 노력들을 해보게 되었다. 한의원에 가서 침도 맞아보고, 맘 카페를 꼼꼼히 검색한 끝에 림프 순환 마사지를 받을 수 있는 곳을 찾아가게 되었다.


물리치료사 출신의 선생님들이 운영하는 곳으로 체형 교정도 겸하는 곳이었는데 왼쪽 목과 어깨가 오른쪽에 비해 솟아있고 굽은 어깨, 거북목 등으로 전반적인 몸 상태가 앞으로 말려 있다고 했다. 아마 여러 번의 수술로 생긴 외상으로 등과 어깨를 쫙 펴지 못하고 자꾸 앞으로 숙이는 자세가 편했던 터라 그대로 굳어버린 것 같았다. 첫 상담을 받으며 나의 병력, 특이 사항, 복용하고 있는 약 등을 상세하게 이야기했고 내 입으로 말하면서도 '이 나이에 이런 히스토리를 갖고 살아온 사람은 잘 없을 텐데, 여기 선생님들도 처음 보는 케이스겠네.' 싶어 민망스럽기도 하였다.


수기로 세 시간여의 관리를 받는 시간 동안 나의 몸이 어떻고, 이 부분을 어떻게 마사지해야 하고, 홈케어는 어떻게 해주면 좋고, 몸을 따뜻하게 하려면, 나와 같은 체형의 사람들에게 어떤 운동이 좋은지 등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치료사 선생님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그때 상담 오셔서 유방암 얘기하시고 폐암 말씀하셨을 때 사실 저희가 정말 놀랐어요. 그래서 가시고 나서 저랑 실장님이랑 진짜 대단하신 거라고.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지금 몸 이렇게 관리하신 거면 진짜 잘 관리하신 거고 정말 대단한 분이라고 계속 그랬어요. 앞으로 더 잘 되실 거예요. 틀림없이요."

나는 멋쩍은 듯이 웃었다. 처음 가는 병원에서 대부분 그렇듯 나의 병력과 아팠던 과거들을 빠짐없이 열거하고 나오며 또 시무룩해졌던 차였다.

"혹시 로또 사시면 로또 되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 힘든 일들 다 이겨내셨으니 앞으로 얼마나 더 좋을 일들이 있겠어요. 좋은 일만 있을 거예요. 틀림없어요. 정말. 믿어요. 진짜."

치료사 선생님은 몇 번이나 힘주어 이야기했다.

"그래서 로또도 사봤는데 안되더라고요. 그거랑은 별게인가 봐요. 하하하."

가끔 사서 긁는 로또 당첨은 아직이지만 내가 생각해도 앞으로 남은 인생 얼마나 더 잘 되려고 그런 일들이 있었을까 싶다.




사람이 살면서 세 번의 기회가 온다고 한다. 나는 내 인생에 찾아 올 마지막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이전 글에도 썼지만 내 삶의 첫 번째 기회는 원하는 대학에 입학한 것, 두 번째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한 것이다. 앞으로의 바람이 있다면 가장 처음 가졌던 꿈인 '작가'로 자리 잡고, 오래오래 글을 쓰며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역사에 길이 남는 대문호까지는 아니어도 글로써 사람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네고, 독자들과 진하게 소통할 수 있다면 소문호, 중문호는 될 수 있지 않을까 바라본다.


나는 나의 때가 언제 일지 모른다. 기회가 오지 않고 삶이 끝나버릴 수도 있다는 것도 잘 안다. 때로는 먼 미래를 그리며 오늘 있는 소소한 행복들을 그냥 흘려보낼까 두렵기도 하다.

글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 소망이 있기 때문에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또 읽고 쓰려고 한다. 사람에 대한 애정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연민 그리고 되도록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려는 시각. 글 쓰기에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를 고민하며 나는 오늘도 나의 때를 기다린다. 언젠가 내가 오랫동안 간절하게 바라던 그 시간이 왔을 때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 맞이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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