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불빛들을 기억해> / 나희덕
불이 환하게 켜진 방에서는 창밖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두운 길에서 불 켜진 방을 바라보면 실내의 풍경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보인다. 행복한 사람에게 타인의 불행은 잘 감지되지 않는 반면, 불행한 사람에게 타인의 행복은 너무 빛나고 선명해 보이는 것도 같은 이치일까. 그런데 불빛 아래 있을 때는 정작 자신을 둘러싼 그 빛의 소중함을 잘 느끼지 못한다. 불빛에서 멀어지고 나서야 그 시간들이 얼마나 따뜻하고 축복받은 순간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몇 해 전, 아이가 갑자기 아파서 두 달 가까이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처음에는 병실이 없어 응급실에서 이틀 동안 기다렸다가 간신히 입원실을 배정받을 수 있었다. 감기도 잘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온 아이에게 갑자기 1형 당뇨라는 질병이 찾아왔을 때, 정말 눈앞이 캄캄해졌다. 당장 오르내리는 혈당을 안정시키는 것도 문제지만, 어린 나이부터 평생 인슐린 주사를 맞으며 살아갈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려 견딜 수가 없었다. 혈당이라는 감옥은 순간순간 우리를 옥죄어 들어왔다.
하지만 앞으로 닥칠 불행까지 미리 걱정할 여유가 없었다. 원하지 않았지만 불시에 들이닥친 질병에 대해 우선 정확하게 알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했고, 하루빨리 병세를 호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이 그때로서는 최선이었다. 왜 하필이면 우리 아이에게 이런 병이 찾아왔을까, 하는 원망이나 질문도 일단 접어두기로 했다. 아이 곁을 지키며 병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달라고 기도할 따름이었다.
그런 막막함 속에서 며칠이 지나고, 나의 시야에는 점점 병동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소아병동의 아이들과 그 부모들은 저마다의 고통과 싸우고 있었다. 일곱 살이 넘었는데도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 열 살의 나이에도 돌배기 정도밖에 성장하지 못하고 인공적인 관리로 간신히 생명을 이어가는 아이, 소화 기능이 약해 고무 호스로 영양을 공급받고 배설해야 하는 열두 살 소년, 척추와 뇌에 종양이 생겨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열다섯 살 소녀... 어떤 아이는 한 끼에 스무 가지가 넘는 약을 먹어야 했고, 어떤 아이는 십 년 이상 병원을 제집처럼 들락거리며 장기 입원을 해야 했다.
그 아이들에 비하면 그래도 우리 아이가 가장 양호한 편이었다. 그런데 놀란 것은 질병과 그토록 오래 싸워온 아이들과 부모들이 아주 씩씩하고 평화롭게 일상을 지켜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생명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지경의 아이들을 한결같이 보살피는 엄마들을 보면서 나의 놀라움은 점차 존경심으로 바뀌어 갔다. 그들도 처음엔 두렵고 막막했다는 말을 들으며 용기를 얻었고, 같은 공간에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연대감이 생겼다.
아이가 조금씩 기운을 되찾게 되면서 아이와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운동 겸 산책을 했다. 혈당을 낮추기 위해서는 운동을 많이 해야 하지만 도심의 병원이라는 공간은 운동과 산책에 그다지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할 수 없이 같은 복도나 계단을 수십 번씩 오르내리면서 운동량을 채워야 했다.
어느 날 저녁, 우리는 걷다가 복도 끝에 앉아 잠시 쉬면서 맞은편 병동을 바라보았다. 수백 개의 창문들에 불이 켜져 있었고, 방마다 각기 다른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늘상 보아온 풍경이지만, 그날따라 불빛 하나하나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 불 켜진 방이라고 해서 늘 행복한 온기로 가득한 것은 아니다. 나는 그 창문들을 가리키며 아이에게 말했다.
"저 수많은 창문들을 보렴. 지금은 병원에 있으니까 주변에 아픈 사람들뿐이지만, 퇴원하는 너는 건강한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야 해. 그러다 보면 왜 나만 이렇게 아플까 하는 생각이 들 거야. 그때 저 불빛들을 기억해. 저렇게 수많은 방 속에서 병과 싸우고 자신과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너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퇴원을 하루 앞두고 나는 병실을 먼저 떠나는 게 미안해 다른 엄마들과 밥이라도 한 끼 나누고 싶었다. 병동 휴게실로 중국 음식을 몇 가지 주문하고, 밖에 나가 소주 한 병을 사 왔다. 병동에서는 술을 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지만, 마지막으로 위로의 술 한 잔을 간절하게 건네고 싶어서였다. 우리는 소주병을 검은 비닐봉지로 싸서 물인 것처럼 종이컵에 따라 마셨다. 고단하고 팍팍한 삶을 잠시나마 그 말간 술에 적시기라도 하듯이 우리는 서로에게 잔을 건네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이따금 종합병원 근처를 지날 때면 나도 모르게 불 켜진 창문들을 한참 올려다본다. 저 불빛 중 하나로 위태롭게 깜박이던 때가 있었지. 그때 함께 있었던 아이들과 엄마들도 잘 있겠지.
어두운 거리에서 불 켜진 창을 바라보는 일이 쓸쓸한 노릇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그 불빛들을 향해 두 손을 가만히 뻗어보기도 한다.
- 나희덕 <저 불빛들을 기억해> 中
암 치료 이후 나와 남편은 (당시 남자친구) 건강한 음식점들을 찾아다녔다. 당시는 결혼하기 전이었고 외식이 불가피했기 때문에 사 먹는 음식이었지만 조금이라도 자연식에 가까운 것들이 있을까 하여 사찰음식, 현미 채식 등으로 식단을 채우곤 했다. 우연히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있는 생채식 전문 식당을 알게 되었는데 북카페도 겸하는 곳이었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만족스러웠던 식사와 함께 구매한 책이 나희덕 작가의 책이었다. 나희덕 작가는 시인으로 더 유명하지만 나는 그녀의 산문도 상당히 좋아한다.
제목은 <저 불빛들을 기억해>였고, 읽고 좋아서 필사 노트에 적은 부분도 제목과 동일했다. 가끔 문장이나 구절이 아닌 전체 글을 모두 옮겨 적는 경우가 있는데, 유려한 문체와 필력에 일부분만 가려내기 어려울 때 그렇다. 팔운동은 조금 고되지만 꿋꿋이 다 옮기고 나면 몇 번을 다시 읽어봐도 좋은 수필들을 모아볼 수 있어 내게 분명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불빛들이 많다. 검푸른 바다에서 빛을 내는 고기잡이 배들, 그들의 무사 귀환을 바라며 기꺼이 길잡이가 되어주는 등대의 불빛, 하늘에 뜬 북극성, 보금자리를 향해 달려가는 자동차들의 불빛, 성냥갑 같은 아파트 창문을 넘어 빛을 내는 따뜻한 가정집 불빛, 내가 애정하는 가수의 콘서트에서 화합과 전율을 이끄는 응원봉의 불빛까지.
반면 세상에 있는 수많은 불빛 중 가장 처연한 빛을 하나 꼽으라면 병원 창문을 통해 반짝이는 병실의 불빛들이 아닐까.
암 치료와 여러 번의 수술로 병원은 나에게 아주 익숙한 곳이 되었다. 하지만 끝끝내 친숙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누군가는 "암과 친구가 돼라"라고 말하지만 나에게 있어 암은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불청객에 불과했다. 알고 나면 빨리 떼어버리고 멀어지고 싶은 것. 녀석을 만났다 헤어진 곳이 모두 병원이었다.
유방암의 경우 수술 범위와 복원 방법에 따라 짧게는 3박 4일에서 일주일 이상 소요되기도 하며 폐 흉강경 수술 역시 일주일 정도의 입원기간이 있었다. 입원을 하러 병동에 도착하면 간호사 선생님들이 이름과 환자번호를 확인하고 '양팔 보호'라고 적힌 팔찌를 양손에 둘러줬다. 때문에 수술장에 들어갈 큰 주사를 다리에 맞아야 했는데, LED 등 밑에서 형사처럼 수색해도 혈관이 잘 나오지 않아 애를 먹곤 했다. 수술장에 갈 침대와 이송 요원이 왔지만 다리에 바늘을 잡지 못해 이동이 지체된 적도 있었다. 이럴 땐 경험이 많은 간호사 선생님들도 당황하기 일쑤기 때문에 몇 번씩 주사 바늘을 꽂았다 쑤시고, 못 찾으면 도로 빼내는 과정을 반복해야 하지만 화를 내서는 안 된다. 내가 불안해하고 보호자들이 동동거릴수록 그들은 더욱 불안해하고, 손에 땀을 쥐게 되기 때문이다. 능숙한 간호사 선생님 몇을 거치고 나서야 겨우 굵은 바늘을 다리에 꽂을 수 있었다. 아직 수술 시작도 하기 전인데 정말 뭐 하나 쉬운 일이란 없다.
주사 바늘을 다리에 잡으면 불편한 점이 참 많은데 손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대신 걸음걸이가 영 못쓰게 된다. 환자복으로 적당히 가려지긴 하지만 발을 디딜 때마다 혈관에서 쭉쭉 피가 나와 보기에도 좀 그렇고 전처럼 편한 걸음일 수가 없다. 수술하기 하루 전 날에는 수액을 수술 시 연결할 손가락 한 마디만 한 관을 바늘로 고정해 놓는데 나는 애석하게도 활력 넘치는 환자라 절뚝거리며 움직임에 익숙해지려 노력했다. 결국 엄마와 머리를 싸맨 끝에 환자용 휠체어에 앉아 편안하게 병원 이곳저곳을 다녀보기로 했다. 성인 여성을 수동 휠체어에 앉히고 그것을 끌고 다니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오만가지 일들이 일어나는 5인 병실을 벗어나 달콤한 일탈을 꿈꾸었다.
한 번은 밤 열 시에 방영하는 드라마를 보기 위해 어려운 발걸음을 옮겼다. TV가 있는 환자 쉼터로 향했다. 멀리 갈 게 아니라서 휠체어도 두고 복도에 설치된 난간을 붙잡고 꾸물꾸물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이게 왠 걸! 밤 열 시인데 휴게실은 환자들로 가득했다. 중년 이상의 나이 드신 분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똑같이 시선을 TV에 두고 맹렬한 기세로 집중하고 계셨다.
'뭐지? 오늘 뭐 재밌는 거 하는 날인가?'
TV에는 가요무대가 한창이었다. 리모컨을 휘-휘- 넘기다가 편성표에서만 언뜻 본 그 가요무대. 머리 모양이 인상적인 중후한 아나운서 아저씨가 진행하는 장수 음악 프로그램. 그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래, 뭐 그럴 수 있지 싶어 위층으로 올라갔다. 다리에 주사 바늘만 없었어도 1분이면 금세 올라갔을 거리인데, 나는 부지런히 가는데도 달팽이 걸음이었다. 오랜 시간이 걸려 위층 쉼터에 도착했다.
아뿔싸. 또 가요무대였다.
멀리서도 한복 자락을 펄럭이며 핸드 마이크를 쥔 누군가가 열창을 하고 있었고, 창문 아래로 희끗희끗하고 뽀글거리는 머리들이 보였다.
"엄마, 안 되겠다. 다리 건너서 신관에 가보자. 거기는 사람 없을 거야."
우리에게 포기란 없었다. 병실로 돌아가 휠체어를 끌고 신관 암센터로 향했다. 복도에 누군가 틀어놓고 끄지 않은 TV가 보였다. 우리는 본체 옆쪽 버튼으로 채널을 맞추고 <키스 먼저할까요>라는 꽤나 자극적인 제목의 드라마가 화면에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TV 앞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편안한 자세를 취했는데 아무리 버튼 이것저것을 눌러봐도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엄마와 나는 결국 어렵게 온 길을 그냥 되돌아가지 못하고 입만 뻐끔대는 드라마를 1시간 동안 시청했다. 남자 배우가 말기암 환자로 나와 열연을 펼쳤고, 열린 결말로 끝나서 다행히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다. 현실적인 사랑이야기와 영상미가 돋보였던 드라마였다. OST가 작품의 인기에 단단히 한 몫했는데 축가로 많이 불리고 있는 폴킴의 '모든 날 모든 순간'이라는 곡이다. 음성 없이 드라마를 보았으니 배경으로 깔린 음악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저 남녀 주인공이 한적하게 바닷가를 걷거나 서로를 그윽하게 바라보는 장면에서 그 노래가 흘렀겠거니 하고 상상을 했다.
병원 생활을 하며 애청하던 드라마가 이번 주에 어떻게 전개됐는지는 딱히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음성이 들리지 않고 화면이 흐려도 돌아가서 OTT나 인터넷 기사로 찾아보면 그만이었다. 다만 내가 평소와 같이 아늑한 집에 있었다면 이 시간에 TV를 보며 행복했을 텐데, 그 시간을 병실에 누워서 흘려보내기가 싫어 부단히 뭐라도 하려고 애썼다.
한 가지 신기한 점은 유행가라고는 잘 모르는 남편이 가끔 "노래 불러달라"고 부탁할 때마다 불러준 곡이 바로 그 '모든 날 모든 순간'이었다. 남편은 연예인에 하등 관심이 없는 편이라 가사를 보지 않고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더 클래식의 '마법의 성' 이후에 이 노래뿐인 것 같았다.
어쨌든 나도 추억이 있는 곡이고 또 좋아하는 노래라 자주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이 노래에 얽힌 병원 생활의 추억들도 함께 그에게 들려주었다.
"여보 내가 있지. 이 노래 나오는 드라마 보려고 엄마랑 주사 바늘 다리에 꽂고 휠체어 타고 온 병실을 다 돌아다녔어. 근데 마지막에 TV를 딱 찾았는데 음량이 안 나오는 거야."
라며 말이다. 영웅담을 늘어 놓 듯 나의 목소리는 크고 폼은 의기양양하다.
서글픈 추억들도 시간이 지나면 빛이 바래진다. 이제 무릎이 아파 조금만 걸어도 힘들어하는 엄마와 휠체어에 앉아 병원을 누비던 그때의 나. 지금 아팠더라면 엄마는 내 휠체어를 미는 것도, 병실 한쪽 간이침대에서 쪼그리고 몇 날 밤을 새우는 일도 못했을 텐데...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는 말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병원에 있는 기간 동안 그래도 즐겁고 유쾌하게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병실에서 바라본 바깥세상은 늘 커다란 투명막으로 막힌 또 다른 세계 같았고, 손을 뻗어도 좀처럼 닿을 수가 없었다. 퇴원하고 밖에 나와 올려다본 병원은 슬픈 기억들 때문에 또렷하게 보이지가 않았다. 정확하게 눈을 맞추면 그때의 내 모습이 더 잘 보이는 것 같아 늘 흐린 눈으로만 고개를 들었다.
요즘도 가끔 어딘가에서 이 노래가 들리면 나는 가만히 그때로 돌아간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암과의 동행에 처음부터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는 우리 가족과 환자처럼 보이기 싫다고 풀 메이크업을 하고 병원을 쏘다니던 어린 날의 내 모습, 당최 하나도 맞지 않은 음으로 꾹꾹 눌러 정성스럽게 노래를 불러주는 남편의 얼굴이 떠오른다.
앞으로도 이 노래를 들을 때면 모든 날 모든 순간이 먹먹하기만 할 것 같다. 애틋한 사랑 노래를 듣고 그저 '사랑' 하나만 떠올릴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