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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log Jan 03. 2025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묄세

<나는 나무에게서 인생을 배웠다> / 우종영


나무는 내일을 걱정하느라 오늘을 망치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 때문에 현재를 희생하는 건 오직 인간뿐이다. 더 큰 문제는 선택 앞에서 지레 겁을 먹고 고민만 하다가 아무것도 못하는 것이다.

미래를 걱정하느라 오늘을 희생하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한 번쯤 청계산의 소나무를 떠올려 보는 건 어떨까. 소나무는 내일을 걱정하느라 오늘을 망치지 않는다.      
방향을 바꾸어야 하면 미련 없이 바꾸었고, 그 결과 소나무는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덕분에 사람들 눈에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었지만 그럼 어떤가. 소나무가 왜 'ㄷ'자 모양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알고 나면 그 지독하고 무서운 결단력에 혀를 내두르게 될 뿐이다. 내일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오늘 이 순간의 선택에 최선을 다하는 소나무.

천수천형. 천 가지 나무에 천 가지 모양이 있다는 뜻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가진 유일무이한 모양새는 매 순간을 생의 마지막처럼 최선을 다한 노력의 결과다.   
수억 년 전부터 지금까지 나무의 선택은 늘 ‘오늘’이었다.     

- 우종영 <나는 나무에게서 인생을 배웠다> 中




나무 의사 우종영님이 쓴 <나는 나무에게서 인생을 배웠다>는 늘 우리 주변에 있지만 스쳐 지나기 바빴던 '나무들'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 준 책이다. 꽃과 나무, 태양과 바람, 물과 구름, 여러 동물들에 이르기까지 자연이 주는 위대한 진리는 언제나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이 책은 그중에서도 '나무'라는 범주에 속한 수십 가지 식물종의 특징을 알아보고 우리가 몰랐던 그들의 이야기와 배울 점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내가 필사한 부분은 '나무는 내일을 걱정하느라 오늘을 망치지 않는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나무는 자기 씨앗이 싹을 틔운 자리가 벼랑 끝이든, 바위틈이든, 홀로 외떨어진 들판 위든 불평하지 않는다. 비옥한 땅에서 수분과 햇빛을 충분히 받으며 자라는 나무들도 있지만 어떤 나무는 물에서도 자라고, 성장 과정에서 옆에 선 나무와 뿌리가 얽히며 하나의 나무처럼 모습이 변하기도 한다. 자연재해로 인해 쓰러지거나 반파되기도 하며 병든 부분이 시멘트 땜질을 당하고 군데군데 옹이가 지면서 투박한 모습으로 변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어찌 됐건 나무는 나무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도 나무고, 고목나무에서도 꽃은 핀다.


내일을 의식하지 않고, 오늘 이 순간의 선택에 최선을 다하는 나무. 내가 선 자리를 탓하지 않고 불가항력적인 날씨에도 순응하는 나무들은 오히려 그런 불확실성 때문에 더욱 뿌리를 견고하게 다지게 된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환경 속에서 나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더 깊고 더 단단히 뿌리내려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는 것뿐이다. 오늘 밤 천둥 번개가 내리쳐 가지가 부러지지는 않을까, 언젠불어올 태풍에 휩쓸려 뿌리가 꺾이지 않을까 앞서 걱정하지 않으며 묵묵히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간다.


법정스님이 쓴 글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산에 사는 짐승들은 먹이를 먹으면서 '내일 어떻게 살까. 식량은 어디 가서 구할까.' 이런 걱정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 하는 행위에 집중하며 맛있게 먹으면 그만이지 밥을 먹으면서도 '다 먹으면 뭐 하지? 내일은 어떡하지?'라는 염려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온전히 현재에 충실하지 못하고 다가오지 않은 시간에 대해 생각이 많은 건 아마도 우리 인간뿐인 것 같다.




반복되는 재발로 항암 치료가 한참이었을 무렵 나는 나 자신이 '나무'같다고 생각했다. 나무처럼 우직하고 오늘에 최선을 다해 살아서가 아니다. 뿌리가 땅에 박혀 그 어디도 자유롭게 가지 못하는 나무. 마음이 더 힘들었을 때에는 그나마 나무는 고사하고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돌멩이' 같다고 생각했다. 돌멩이는 나무와 같은 뿌리도 없어 누가 발로 차기 전까지는 놓인 자리에서 평생을 벗어나지 못한다.


빡빡 깎은 머리와 퉁퉁 부은 몸 그리고 여기저기 밀려드는 통증으로 집 밖을 나서기 힘들었을 때, 궁여지책으로 베란다에 캠핑 의자를 펴고 걸터앉았다. 거기서 창밖을 바라보면 방충망 사이로 설악산도 조금 보이고, 도로도 조금, 맞은편 아파트와 주차장을 오고 가는 사람들도 보였다. 나는 그들에게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어디 가세요~~ 저도 같이 가요~~"

를 외쳤다. 너무 궁금했다. 예쁘게 차려입고 다들 어디를 가시는지. 나도 같이 가고 싶었다. 아무 데나 자유롭게. 어디든 가보고 싶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엄마가 실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여러 번의 수술로 몸에 난 상처들이 하나 둘 늘어날 때에는 내 모습이 옹이 진 나무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이따금 여러 군데 옹이가 있는 나무를 만날 때면 쉽게 지나치지 못했다.

'옹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나무에 박힌 가지의 그루터기'를 의미한다. 새로운 가지가 돋거나 가지가 잘려나간 자리에도 옹이가 생긴다. 모진 비바람을 견디며 가지가 부러졌을 때 생긴 옹이는 가지를 버림으로써 나무를 살게 한 영광의 상처일 수 있고, 새로운 가지를 만들어내며 생긴 옹이는 생명의 산실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내 몸에 난 칼자국들을 '나를 살게 한 영광의 상처'라며 긍정 회로를 돌려보았지만 그래도 샤워할 때마다 시선을 지 않으려 애쓰게 되는 건 어쩔 수 었다.


하루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암이 가슴에 생기면 가슴도 자르고 폐에 생기면 폐도 자르고...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엄마는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다.

"그럼. 그래도 살아있는 게 좋은 거야. 다 자르고 도려내도 살기만 하면 돼..."

딱히  말이 없었다. '죽는 것보단 낫지' 하고 사는 게 뭐 좋을까 싶다가도 '이렇게라도 사는 게 낫겠' 하고 애써 로하며 털어버렸다.


성당 활동을 함께했던 친한 언니에게도 말했다.

"언니, 에 상처가 많아서 거울 볼 때마다 속상해요."

"아녜스. 그래도 그만하길 다행이야. 드러나는 곳에 큰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은걸."

 

모두 맞는 말이었다. 나는 아마 보이는 곳에 더 크고 많은 상처들이 있더라도 끝끝내 살고 싶었을 것이다.




스스로를 나무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나무의 좋은 점은 눈여겨보지 않았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오지 않은 미래를 앞서 걱정하지 않으며 내가 선 자리를 탓하지 않는 나무. 환경에 순응하고 운명에 순종하면서도 굳건히 내린 뿌리로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는 나무. 인고의 세월을 나이테로 새기기까지 묵묵히 버티며 결국에는 한 그루의 고목으로 성장하는 나무. 꽃처럼 화려하고 진한 향기는 없어도 기대어 쉴 수 있는 그늘을 내어주는 나무. 일 년 사계절 움틀 때와 열매를 맺을 때 그리고 내려놓을 때를 아는 나무. 미련도 후회도 없이 가진 것을 전부 버리고 가볍게 한 해를 시작하는 나무.

 

자유롭게 다니지 못한다고, 상처가 많다고 애처롭게만 여겼었는데 나무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하고 위대한 존재였다. 한 오백 년쯤 너끈히 사는 나무들도 많으니 '장수'가 꿈인 나에게는 선망의 대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나는 과거의 겪었던 질병이라는 트라우마가 반복되면서 건강 염려증이 생겼고, 재발과 전이를 두려워하며 오늘에 충실하지 못한 적이 많았다. 병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그 굴레를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도 나무처럼 당당하게 오늘을 맞고 싶다. 어떤 일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않도록 더 깊고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며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어쩌면 인생이란 별 다른 의미가 없는 것 일 수도 있지 않은가. 큰 의미를 찾으려 애쓰며 마음 졸이지 , 담담하고 산뜻하게 오늘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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