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림자놀이 3부

4. 첫사랑은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by 운정

대학가의 5월은 그야말로 축제판이었다.

교내 방송국 아나운서의 낭랑하고 청량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음악이 교정에 울려 퍼졌다.

정오가 되면 교내 방송이 시작되고 음악과 재밌는 멘트들로 교정이 시끌시끌해지곤 했다.


'라때는 말이지 정오가 되면 어디선가 꽹과리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지. 사물놀이패가 앞장서, 그 뒤로 운동권학생들의 구호가 이어지지. 학생들이 속속 모여들어 행렬이 점점 더 커지다가 모두 이곳 민주광장에 모여 대동세상을 꿈꾸며 목이 터져라 외치지..'


혼잣소리처럼 그녀의 머릿속 어디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듯 생각에 잠겼다.

정선은 학교에 오면 앳된 청년들 틈에서 그 시절 어린 날의 정선 자신을 만나는 것 같았다.

교내 방송에서 들려주는 남자가수의 애끓는 발라드에 흥얼거리고 있거나 걸그룹의 중독성 있는 리듬에 자신도 모르게 발을 바닥에 톡톡 거리며 리듬을 타며 몸을 흔들까 말까 둠칫거리기도 했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심수봉가수의 노래가 들려왔다.

학생아나운서는 신나는 목소리로 이런 노래 아세요? 하면서 오래된 CD를 찾아 틀었다.

정선은 보던 책을 덮고 차 한잔을 내려 창가에 서서 교정을 내려다보았다.


강의는 오전에 있었다. 두 과목 월수금 두 시간 강의하고 강사들이 사용하는 공용 연구실에서 오후 서너시까지 교재 연구를 하거나 논문을 읽었다.

오늘은 학생들이 중간고사를 치르고 난 뒤, 강의는 없었지만 채점과 평가를 하기 위해 연구실에 출근했다.


'똑똑' 노크소리였다.

가끔 한교수가 방문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정선이 대부분 호출을 당하곤 해서 이 방에 올 사람이 없었다.

다른 강사들은 노크를 하지 않았다. 더구나 이 시간에 노크라니, 문을 바라보았다.


'네.' 짧게 대답하자 문이 열렸다.


그였다.

그녀는 언젠가 교내 어디에서라도 그와 마주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찾아올 줄은 몰랐다.

정선과 필상의 연구실은 각각 다른 동에 있어 학교에 있는 동안 여태 2개월이 지나도록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얼어붙은 듯 가만히 서있는 정선을 향해 그가 다가왔다.


"차 한잔 줄 수 있지?"


정선은 그의 눈을 바라보면 뭔가 알레르기가 올라오는 듯 몸 여기저기가 가렵고 숨이 가빠왔다.

지금에 와서 생긴 현상은 아니고 예전부터 그랬다.

정선은 그가 옆에 앉아 귀를 잡거나 목덜미 근처에서 숨소리를 내 그의 따뜻한 온기가 전해오면 소름이 돋아나고 몸이 떨려옴을 느꼈다. 마치 큰 물결이 밀려 덮친 듯 숨을 쉬지 못했다.

그의 존재는 언제나 벅찼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사랑이었다.


정선은 조용히 몸을 돌려 찻주전자에 물을 넣고 전원을 연결했다.

그녀는 등에서 그의 시선을 느꼈다.

물이 적당한 온도가 되자 차 주전자를 가지고 와 보이차를 내렸다.

차를 따르는 그녀의 손과 찻잔에 그들의 시선이 머물렀다.


그윽하고 깊은 차향이 그녀와 그 사이에 퍼지며 서로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차를 마셨다.

그는 눈을 감고 소파에 기대었다.

그는 두텁고 각이 진 아래턱과 굵은 목, 그리고 넓고 단단한 어깨를 가지고 있었다.

눈과 코는 여성스러우리만치 부드러운 선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체적인 실루엣은 굵직한 선을 가진 남자였다.

대조적인 그의 성격의 양면성을 보는 것 같았다. 그의 눈빛을 사랑했다. 그의 부드러움을 사랑했다.

그녀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자신의 가슴 한 곳에 자리한 그의 존재를 보았다.

이제 사랑이라고 착각하지는 않더라도 가슴을 후비는 감정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아련하게 느껴졌다.

그의 감은 눈끝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차 두 잔 정도 마시고 일어섰다.


"가끔 차 마시러 와도 되지? 그것만은 안된다고 말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


정선은 자기도 모르게 조금 웃음이 났다.

덩치는 커다란 중년에 접어든 남자가 어린애처럼 떼를 쓰는 것 같아 우스웠다.


'그래, 이런 건 누구나 하고 할 수 있는 일이야, 거절하는 게 더 이상한 걸지도 몰라.'


정선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는 활기차게 한 손을 들어 보이며 바이바이 하며 연구실을 나갔다.

정선은 꼿꼿이 앉아 있다 긴장이 풀리며 물결에 쓸리듯 털썩 소파 뒤로 몸을 떨구었다.

그는 그 뒤로 월수금 정선이 차 마시는 시간에 어김없이 나타났다.

그는 정선의 교내 시간과 동선을 다 알고 있는 듯, 그리고 예전 그대로인듯 자연스러웠다.

누가 먼저 입을 뗄것인가 내기라도 하듯이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5분 남짓 침묵 속에서 차 마시기에만 집중했다.


'이 사람과 차 한잔 제대로 마셔본적이 있었는가?'


예전 정선은 필상과 연구인지 연애인지 모를 2년이라는 시간 동안 거의 매일 하루종일 함께 있었다.

그럼에도 두사람은 마주 보고 차 한잔을 한 적이 없었다.

그 때는 그들은 눈을 마주보며 차한잔할 여유가 없었다.


'이제서야 차한잔의 음미함이라'


정선은 필상과 새로운 의식을 치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정선은 그가 배를 타고 떠나가던 꿈속 검은 강가에서 그를 바라보던 때가 떠올랐다.

이별 후로 거의 매일 같은 꿈을 꾸었다.

그것은 매일 치르는 이별의식이었다.

뉴욕의 길거리를 싸돌아다니며 노래를 불렀다.

이별을 노래하며 매일 그와 이별을 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이렇게 마주보며 또 하나의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심지어 경건하기 조차 했다.

두 사람사이의 공기는 밀도가 높고 무거우며 꽉차있었고 고요했다.

발 꼼지락 거림과 다기와 유리탁자 부딧는 소리, 숨소리 그리고 미세한 차향과 공기 흐름조차도

사람에게는 큰 움직임이었고 이벤트였다.


어느 날, 그가 입을 열었다.


"정선아, 나는 멈춘 우리의 시간을 흐르게 하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뭐든지 하고 싶어."


정신이 아득했다.

그의 부재가 준 충격이 그녀를 여기로 이끌고 온것 같았다.

아무리해도 그를 떠날수 없는 마음 한조각이 정선을 학교로 오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선은 그의 눈을 보며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당신은 저의 첫사랑이에요. 첫사랑은 더 이상 자라지 않아요. 그 자체로 완결되었어요."


그는 한참을 허공을 응시하다 자리에 일어섰다.


"다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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