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감각기억의 그림자
'잉' 휴대폰 진동소리에 사색에 잠겨있던 정선은 눈을 떴다.
그녀는 어떤 주제에 대한 생각을 하자 맘을 먹으면 그 주제의 끄트머리까지 왔다고 여길때까지 생각에 잠기는 버릇이 있었다. 생각의 그 끄트머리란 그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지점을 뜻했다.
그 생각이 무엇인가를 결정하고 정리가 될 때까지 마음의 흐름을 따라 갔다.
일부러 차를 몰고 나가 공원의 숲이나 강변뚝길을 거닐면서 사색을 하곤 했지만 상담소를 연 다음부터는 대부분 서재 바닥에 앉아 눈을 감고 사색하곤 했다.
방해받지 않기 위해 아무도 방문하지 않는 시간에 문을 잠그고 음악이든 휴대폰이든 다 꺼놓았다.
꺼놓기를 잊었는지 휴대폰의 진동소리는 정선의 사색의 시간을 방해하며 줄기차게 울어대고 있었다.
화면창에 이름없는 번호가 떠 있었다.
익숙한 끝자리, 5482...., 그였다.
논문속에 파묻혀있다 고개를 들면 언제부터 정선을 보고 있었는지 그가 말했다.
"오, 사팔이!"
필상은 그녀의 눈알이 한쪽으로 몰린 것을 놀려대었다. 그녀는 소리내어 웃었다.
오랜 시간 작은 글자를 보다 고개를 들면 눈동자들은 갑자기 다른 곳에 시선을 두기 위해 움직이면서 잠깐 사시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 전화번호 뒷자리야, 5482."
그래서 그의 전화번호는 잊어본적이 없다.
정선은 잠시 망설이다 빨간 원을 누르고 휴대폰을 껐다.
요즘 이런 식의 그의 접근이 약간은 짜증스러웠다. 깜짝 놀랐다.
그로 인해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리라곤 상상한 적이 없었다.
유학시절, 외로움, 그리움, 그에 대한 모든 기억과 감성을 노래에 담아 다 보내려 했다.
유학시절 6년 내내 수많은 시간을 쏟아 그를 물리쳤다.
'사랑한다,', '사랑이 아니야, 의지했을뿐이야.'
'보고싶다.', '부질없다.'
'그립다.', '가치없는 감상일 뿐이야.'
끝없는 변명과 핑계의 반복속에서 생각의 꼬리를 물다 결국 지친 것은 그녀였다.
끝을 맺지 못했다. 그냥 잊기로 했다. 그냥 생각을 안하기로 했다. 생각이 나지 않았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에 대한 상념이 떠오른다는 것 자체가 짜증스러운 일이었다.
3일째 정선은 마음의 흐름을 따라 깊이 더 깊이 들어가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 사색의 끝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이든간에 그와 다시 시간을 이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마음먹었다.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의 끝을 보기로.
남아있는 이것은 무엇인가? 두려웠다. 되살아나는 그것이.
과거 경험의 사실적 기억은 왜곡되기 쉽다.
여러 사람이 같은 상황에 놓여있었다해도 거기 있던 사람들은 각자 기억이 다르다.
기억은 해석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해석은 상황을 경험하는 사람의 필터를 통과한다.
그렇게 저장된 기억은 아주 빠르게 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오랜 시간이 지나도 기억되는 것은 무엇일까?
감각기억이다.
그녀에게 되살아 난 것은 상황적 사실도 아니고 생각도 이미지도 아니었다.
세포에 저장된 감각기억이었다.
이것은 마치 유령같기도 하고 투명하게 감각세포에 콕콕 박혀 있었다.
유사한 상황이나 유사한 감정을 마주하면 세포를 찌르며 되살아 나는 것이 감각기억이다.
미정이 어린 시절 겪었던 성폭력 감각기억이 그랬을 것이다.
끈질기게 몸의 감각에 달라 붙어 기회만 되면 되살아나 그녀를 괴롭혔던 것이다.
감각은 실제적이다.
트라우마란 바로 죽을 것 같은 공포의 감각기억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이다.
그토록 두려웠던 그것, 잊으려 끝까지 버텼던 그것.
정선은 얽기 설켜있는 감각기억을 소환해야만 했다.
사실 소환하고 말고는 없었다.
이미 그를 다시 마주한 순간부터 감각세포들은 요동을 쳤으니 말이다.
그것은 트라우마였다. 그의 실종은 뒷통수를 가격하고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감각세포를 돌보지 않았다.
그녀의 상처는 덮어졌다. 그리움, 외로움, 슬픔, 우울함 등은 감각세포의 움직임을 덮기위한 수작이었다.
죽을 것 같은 고통, 감각기억, 그것은 트라우마였다.
그것과 마주 서야 했다. 버티고 통과해야 했다.
감각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 지는 순간, 진짜 삶이 다시 시작되며 마음의 강물이 흐르리라.
하얀이를 드러내며 웃는 그의 얼굴이 보인다.
가슴윗쪽 가운데가 아려온다. 호흡이 짧고 가빠오는 것을 느껐다.
등쪽 어딘가에 간질거림이 느껴진다. 온 몸 세포의 움직인다.
묵직함이 '웅'하며 아랫배를 누른다.
뇨기가 느껴진다.
'감각 기억'이 되살아 나고 있었다.
이마를 찡그린다. 통증이 올라온다.
입이 벌어지며 혀 사이사이에 침이 고여온다.
온 몸의 세포가 조여온다.
정선은 호흡을 가다듬고 아픈 감각속에 머물렀다.
이미지, 신체적 기억, 과거 상황들의 온갖 환영이 흘러 들어왔다.
필상의 눈길과 손길이 스쳐간 그녀의 모든 곳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감각속에 머무르되 빠지지 않는 것.
황홀했고 간지러웠고 아팠고 떨렸다.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심장이 고동쳤다.
바라보는자가 고통하며 괴로워하는 자를 바라보았다.
감각뒤에 따라붙어있는 상념, 감각의 그림자였다.
그림자 또한 자기였으며 감추고 숨기고 싶은 자신이었음을 고백했다.
감각을 허락하되 빠지 않기, 붙어있는 그림자를 바라보기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감각기억과 그림자는 오래도록 고착되고 경직된채로 그대로 그 자리에 지박령이 되어 있었다..
어둠에 그대로 잠식되어 있었던 감각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감각회로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죽을 것 같은 감각이 덮쳐왔다.
정선은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몇시간이 흘렀을까?,
가만 가만 몸을 움직였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며 허리를 들어 올리고 오른다리와 왼다리를 차례로 앞으로 폈다 접었다 반복했다. 긴 호흡을 하며 허리를 앞으로 구부렸다 뒤로 활처럼 펴기를 반복했다.
한참을 가부좌로 앉아있었다.
그녀의 눈물이 그치고 숨이 편안히 쉬어졌다.
천천히 일어나 서재 벽등을 모두 켰다.
주전자에 물을 넣고 불에 올리고나서 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저녁 함께 먹을까?"
지우가 대답했다.
"오늘 예솔이 레슨이 있어. 아, 말하는 것을 깜박했다. 이번 주는 두 번가기로 해서 그게 오늘인데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