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노인과 죽음

by 또다시

"노인들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걸까?"


한 노인이 뜬금없이 친척과 지인들께 선물을 돌렸다. 집안엔 반 년 이상 넉넉히 지낼 식량과 생필품을 사 놓았단다. 자신이 없어도 남은 가족이 편히 살도록. 노인은 한 달도 못되어서 돌아가셨다.


아빠도 그랬다. 명절 때 집에 가면 마트에 가자고 했다. 그리곤 있는 물건을 또 사자고 했다.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샴푸, 치약, 칫솔 등을 샀다. 명절을 보내고 헤어질 때면 다시 못 만날 사람처럼 유언 비슷한 말씀을 하시고 늘 우셨다. "잘 살아!"


살아있으니 살아야 했나보다. 덜 고통스럽게. 병원에서 검사 받고 약국에서 약을 샀다. 식탁의 반 이상을 약이 차지하고 있었다. 마트에서 먹을 것을 사고 홈쇼핑에서 건강식품을 주문했다. 코로나 예방용 마스크가 큰 상자에 가득 담겨 있었고 냉동실엔 고단백 장어가 저장돼 있었다. 주인 없는 집엔 주인의 체취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곧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영영 돌아가지 못했다.


아빠는 폐렴으로 두 달을 입원했다. 어렵게 병을 이겼지만 근손실이 와 걷지를 못했다. 엄마는 아빠 병간호를 반 년 넘게 하셨다. 약한 몸으로 병원을 오가며, 그리고 퇴원 후엔 집에서 아빠의 손과 발이 되었다. 아빠가 걷지를 못하니 대소변이 가장 큰 문제였고 엄마가 큰 고생을 했다. 병든 남편을 살리려고 매일 맛난 음식을 요리했고 입맛 없는 환자를 구슬려 먹였다.


어느 날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소피아야, 엄마 죽을 병에 걸렸다. 폐암이래."


엄마를 살려야 했다. 유명한 병원에 가면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엄마 아빠 모두 우리 집으로 모셔왔다. 맞벌이 직장인 내가 엄마 아빠 두 분을 다 모실 수 없다고 형제들은 아빠를 요양원으로 보냈다. 아빠는 가지 않겠다고 발버둥을 쳤지만 자신도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아셨다.


엄마는 우리 집에 계시면서 연세 암병원에 다녔다. 갖은 검사를 했다. 다행히 전이되지 않았지만 예후가 좋지 않은, 수술도 불가능한 소세포폐암이었다. 젊은 사람도 힘들다는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엄마는 꿋꿋이 견뎌냈다. 모범생인 엄마는 의사가 하라는 대로 최선을 다했다. 잘 먹고 잘 걷고 약도 잘 먹었다. 주변에선 87세 노인이 항암치료를 받는 것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엄마는 3개월 동안 항암치료 4주기를 무사히 끝냈다. 6cm였던 암이 많이 줄었고 심한 기침도 멎었다. 방사선 부작용으로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던 식도염도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나았다. 엄마는 목포 집으로 귀향했다.


엄마가 암 치료를 하는 동안, 아빠는 여전히 요양원에 계셨고 몸은 날로 약해지셨다. 음식을 거부하셨고 몸엔 폐렴 말고도 다른 많은 병이 찾아왔다. 엄마와 함께 목포 집에서 사는 소원도 이루지 못했다. 이젠 요양원을 벗어날 수 없을 만큼 몸이 약해졌다. 혼자 걸을 수도 먹을 수도 없었다. 자식들은 돌아가시기 전에 두 분을 만나게 해드리고 싶었다. 어렵게 어렵게 아빠는 목포 집으로 모셨다. 딱 하룻밤을 주무시고 다시 요양원으로 가셨다. 엄마는 아빠에게 말했다.


"우리 하늘 나라에서 만납시다."


아빠는 한 달 뒤에 돌아가셨다. 쓸쓸하게, 슬프게.


엄마는 1차 항암치료 후 두어 달을 혼자서 목포에서 사셨다. 봄이 되었고 정기검진을 하러 우리 집에 다시 오셨다. 가슴 철렁한 소식을 들었다. 암이 뇌와 간에 전이가 되었단다. 2차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이번엔 1차 때와 달리 잦은 부작용이 있었다. 항암약은 엄마 피 속의 중요한 세포들까지 다 죽여놨다. 곰팡이균, 세균에 감염되었다. 열이 났고 설사를 했고 혈압도 떨어졌다. 어지러웠고 입맛도 떨어졌다. 응급실에 들락날락했다. 입원과 퇴원도 반복했다. 그때마다 병원에선 엄마를 살려냈고 다시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시작하곤 했다. 엄마는 점점 약해졌다. 몇 날 며칠 열대야가 지속되던 어느 날, 엄마는 퇴원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 다시는 세브란스 병원에 가기 싫다."


엄마의 마지막 한 달은 은평성모병원 호스피스병동에서였다. 말기암 환자가 되었다. 먹지도 움직이지도 못했다. 목구멍 밖으로 소리 내는 것도 어려워 말도 하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펜으로 적고 싶어도 힘이 없어서 쓰지 못했다. 자식들이 돌아가며 엄마를 돌봤지만 아무런 의사소통도 하지 못했다. 엄마는 서서히 죽어갔다. 그리고 돌아가셨다.



오늘 미사를 드리며 생각했다. 아빠를 요양원에 보내지 말고 우리 집에서 엄마랑 계시게 했으면 아빠가 덜 비참했겠다고. 우린 만약 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했더라면 등의 하지 못했던 과거의 일을 두고 늘 후회를 한다. 결과는 어찌 되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때때로 내가 저주받은 큰 죄인인 것만 같았다.



엄마는 최선을 다해 삶을 사셨다. 엄마에게 남은 버킷리스트가 있냐고 물었었다. 엄마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자신의 인생에 만족한다고 하셨다. 참, 마지막 소원 한 가지가 있었다. '고통 없이 죽는 것!' 엄마는 암환자가 죽을 때 큰 통증으로 고통받는 것을 두려워하셨다. 그리고 고통 없이 죽기를, 평안히 선종하기를 간절히 기도하셨다. 엄마의 기도는 늘 그랬듯이 이루어졌다. 고통 없이 선종하셨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 11개월, 엄마가 돌아가신 지 2개월이 되었다. 나의 지난 2년 세월을 병든 부모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나의 2년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정도로 많은 시간을 부모님과 함께 보냈다. 너무나도 슬프고 마음 아파서 지난 2년을 지워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용기를 내어 그동안 쓴 단상들을 모으기로 했다. 이제, 이 글들이 남겨진 나에게 그리고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