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종이 지갑

by 박 혜리


영정사진 속 아버지는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웃고 계셨다.


한여름의 매미소리가 잦아들고 더위도 한풀 꺾여 한층 더 높아가는 하늘은 가을이 멀지 않았음을 알리는데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난 고향 찻집에서 한담을 나누었다. 저녁을 먹고 늦은 밤 친구는 마을의 회관 앞까지 나를 바래다주었다.


집은 불을 밝히지 않은 채 정적이 흘렀고 미리 엄마에게 알리지 않아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안방 문을 열었는데 몸무게가 확연히 줄어든 엄마는 나의 방문이 귀찮은 듯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굼벵이처럼 조그맣게 웅크린 엄마의 모습을 본 순간 나는 쿵하고 가슴이 내려앉았는데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말에 나는 달리다시피 안방 맞은편 미닫이문을 화들짝 하고 밀었다. 엄마 못지않게 야윈 아버지는 숨소리마저 멎은 듯 적막함 속에 누워 계셨는데 엄마는 면목이 없어서 내게 알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동쪽 하늘이 여명으로 밝아올 무렵 아이를 데려오기 위해 이른 아침에 나는 버스를 탔고 남편에겐 며칠 부모님 옆에 있을 거라 말하였는데 일을 마친 남편이 왔을 때 응급차에 아버지를 태워 병원에서 몇 가지 검사를 하였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피운 담배로 폐의 질환이 의심된다 하였는데 수액을 꽂은 링거 주삿바늘을 몇 번이나 뽑으시며 아버지는 집에 가자 하셨다. 아버지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시기라도 한 듯 죽어도 집에서 죽겠다 하셨는데 난 집에서 가까운 병원으로 모시길 원했지만 뒤늦게 도착한 동생들은 아버지를 집으로 모시기로 의논을 모았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그제야 평온을 되찾았는데 마치 먼길을 떠나시기라도 하듯이 난 처음으로 아버지의 손발톱을 깨끗하게 깎아드렸다. 며칠 후 나는 먹을 음식을 준비해서 가져오기로 하고 내가 사는 집에 갔는데 아버지는 그날 밤 세상을 떠나셨다.


수의를 입고 병풍 뒤에 반듯하게 누운 창백한 아버지의 낯선 얼굴을 보며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한참을 바라보며 나는 속울음을 삼켰는데 아버지의 빈소가 차려진 집은 동네 사람들과 일가친척들이 하나 둘 속속 도착하였고 그때마다 아이고 하는 나의 곡소리는 집안 가득 울려 퍼졌다.




아버지가 술을 드시지 않을 때면 엄마는 마치 고삐가 풀린 것처럼 대들곤 하였는데 팔을 들을 때면 얼어붙은 피에로처럼 다른 데로 숨을 엄두를 내지 않으셨다. 나는 그때마다 엄마가 아버지 눈에서 벗어날 곳을 찾아 헤매어야 했다.


나는 굳게 걸어 잠근 큰집 대문을 연신 두드리고 있었다. 큰아버지 제발 아버지 좀 말려주세요 라는 울부짖음과 함께.


아버지가 술을 드신 날이면 술기운에 의지한 채 미처 삭히지 못한 울분들을 토해내셨는데 삼남 일녀의 형제 중 셋째인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마저 졸업하지 못한 것을 두고 할아버지를 많이 원망하였다. 신혼의 단꿈이 깨기도 전에 일하러 갔다가 사고로 돌아가신 나는 얼굴도 기억 안나는 막내 삼촌을 그리워하며 끄윽끄윽 울음을 토해 내기도 하였는데 아버지가 매번 노래의 후렴구처럼 붙이는 말끝엔 엄마가 시집오기 전 돌아가신 외조부모님들의 부재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아버지가 눈물을 보이면 속상함이 전해져 덩달아 나도 마음 한편이 아렸는데 굼뜬 엄마가 아버지의 눈에라도 띄는 날엔 작은 체구의 나는 싸움을 말리다가 급한 마음에 맨발로 큰집을 향해 내달렸다.


그날도 아버지는 술을 드셨고 몸을 추스리기 위해 집에 있었던 나는 송아지가 태어나서 가계에 보탬이 되려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돈이 생기자 아버지는 또다시 노름에 손을 대고자 하였다. 누구 듣을세라 엄마는 큰집에서 푸념 중이시고 보다 못한 나는 내가 사는 도시로 가자고 손을 잡아 이끄는데 평소에 그렇게 못마땅하게 여겨셨음에도 꿈쩍도 하지 않으셨다.


그날 밤 돈을 내놓으라는 아버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집 뒤 대나무 숲을 흔들고 내 가슴엔 동백꽃보다 붉은 생채기가 생겼다.


다른 형제와 달리 눈엣 가시같이 편애하는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사춘기 소년의 반항처럼 방문을 등진 채 누운 무기력한 아버지의 모습은 아카시아 꽃향기가 지천에 흩날리는 봄이면 내겐 검은 동공 같은 먹구름을 안겼고 바쁜 농번기에 경운기 소리가 저 멀리에서 들리면 허연 거품을 입에 문 간질환자처럼 머릿속이 빙빙 돌고 천둥소리 같은 공명이 내 안에서 울렸다.


긴긴 겨울 깊은 잠에 든 파충류의 동면처럼, 보름

날 짚더미를 쌓아놓고 쥐불놀이하며 팔을 흔드는 광대처럼 아버지는 그렇게 한평생을 살다 가셨다.


봄볕이 따사로운 날, 담벼락 옆에서 함께 꽃씨를 뿌려 꽃밭을 만들고 아버지는 이쁜 종이 지갑을 접어 수줍은 웃음을 지은 채 내게 내미셨는데 엄마가 미리 준비한 영정사진 말고는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이 없는데 그날 종이 지갑과 함께 찬란한 햇살처럼 눈부시던 따뜻한 미소의 아버지는 내 가슴속에 인화된 사진처럼 여전히 머물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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