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

by 박 혜리


"원래 약한 인간일수록 사악해. 그래서 사악한 놈들이 좀 짠한 면이 있어."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에서 손석구가 한 말



여동생은 서울에 간지 삼 년이 다 되어갈 무렵에 나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A4용지 반만 한 편지지에는 "언제나 나의 별인 언니에게"로 시작하여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언니에게로 돌아가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아이는 내게 전화를 했는데 아는 친구가 동네 오빠와 함께 살고 있는데 거기로 갈 것이지만 언니한테 가고 싶다고... 언니가 받아주지 않으면 절교하겠다는 말과 함께.

그 말은 내가 살면서 들어본 말 중 가장 아픈 말이었다. 아는 친구라지만 남자와 함께 살고 있는 곳에 동생을 보낼 수 없는 나는 먼저 내려온 남동생은 방을 얻어 내보내고 대신 여동생이 그 방으로 들어왔다.


대학에 돌아갈 수 없는 여동생은 하루는 내게 물었다.

"언니 앞으로 내가 뭘 하면 좋을까"

"뭘 잘할 수 있는데? "하고 나는 여동생에게 되물었다.

여동생은 조금 생각해 보더니 "공부"라고 대답을 하였다.

동생의 말에 곰곰이 생각한 나는 대학에서 전공한 학과를 떠올리고는 "그래, 그러면 너는 공무원 시험을 보는 게 어떠냐"라고 말을 하였다.

별 고민 없이 여동생은 그렇게 공무원 준비를 하였고 유모차를 밀고 다니며 나는 시장을 보고 생활비를 아낀다며 남편에게도 잘 해먹이지 않았던 보양식을 해먹이며 삼시세끼 밥을 차렸다. 다행스럽게도 공부 머리가 있는 여동생은 고등학교 삼 년을 샛별 보며 학교에 가고 늦은 밤까지 노력한 덕분인지 공부를 시작한 지 육 개월 만에 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런 여동생을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는데 내가 시집을 가면 언니에게 뭘 해주기 힘들 거 같다며 백화점에서 산 앵클부츠 한 켤레를 내게 선물하였다. 여동생이 빨리 공무원시험에 합격을 하여 기특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았는데 동생은 말하는 도중에 또 뜬금없이 "언니는 나처럼 될 수 없어" 라며 한마디 내게 툭 던진다. 서울에서 내려올 때 걸려온 전화도 나는 가슴이 서늘하였는데 여동생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여 그렇게 또 내뱉는다.


우리 삼 형제는 공부를 잘하였다.


학교에 다녀오면 풀을 베고 고구마를 캐며 밭일을 하여 손등이 거칠어진 나와 달리 여동생은 손이 고왔다. 일을 마치고 와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그 아이 옆에 누울 때면 나는 여동생의 부드러운 손을 꼭 쥐었다. 동생이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우리는 그렇게 손을 잡고 잠을 잤다.


맏딸인 나와 달리 엄마는 막내인 동생에게 일을 시키지 않았고 그 시간에 그 아이는 오직 공부만 하였다. 그래서인지 여동생은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전교 1,2등을 다투었다. 고등학교 입시를 얼마 남겨 두지 않고는 오가는 등교 시간이 아깝다며 학교 근처에 방을 얻어 손수 엄마가 반찬을 만들어서 가져다주었다. 입시를 며칠 앞두고는 집과 가까운 학교에서 올 장학금을 받으며 삼 년을 학비를 내지 않고 다닐 수 있었지만 명문고에서 당당하게 겨뤄 보고 싶어 하는 동생은 몇 년 전 나처럼 혼자 방에서 울었다. 공부를 하며 일을 하고 과로에다 영양결핍으로 뼈만 남아 집에서 쉬고 있던 나는 우는 동생이 안타까워 또다시 도시락 두 개를 싸며 뒷바라지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여동생은 졸업을 할 무렵에 학원 한번 다니지 않고도 서울의 명문대와 의대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집안 형편을 고려하여 국립대에 등록을 하였다.


올 장학금을 노렸지만 처음 도입된 수능으로 과 차석을 차지한 동생은 내가 등록금을 대어 대학을 다니며 방학 때에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여동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병역특례를 마친 남동생이 캐드 설계를 한다며 자취생활을 할 때 함께 있었는데 동생들과 떨어져 살게 된 나는 집을 나온 이후 김치 한번 담아주지 않는 엄마를 대신하여 주말의 대부분을 동생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밑반찬을 만들었다.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때 서울에 있는 친구 집에 놀러 와 있다며 하루는 여동생이 내게 전화를 하였다. 동생은 잠시 휴학을 하고 생활비와 학비를 벌려고 하는데 지낼 방을 얻어야 한다며 돈이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여유 있게 학비도 벌고 사회생활을 미리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결혼을 하기 전에 동생 학비에 보태라며 주려고 했던 것을 여동생에게 보냈다. 그리고 가끔 우리는 통화를 하였는데 잘 지내고 있다는 동생의 말에 난 어떤 의심도 하지 않았고 내 결혼식에 호피무늬 치마를 입고 나타난 동생에게서 나는 어떤 불온한 낌새도 알아차릴 수 없었다.


동생이 다단계에 빠졌다는 걸 안 건 대학교를 다니면서 만난 CC로 지내던 동생의 남자 친구가 남동생에게 연락을 해오면서부터였다. 그것은 실로 내게 날벼락이었다. 우리는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사실로 확인하였는데 남동생과 함께 나는 전화도 되지 않는 동생을 어떻게든 내려오게 하려고 사방으로 노력을 하였다. 그러던 중 남동생은 그곳에 먼저 가 있던 동네 친구에게 포섭되어 전세금을 빼서 서울로 나 몰래 가버렸다. 또래의 친구들을 끌어들여 학교의 대자보에 이름이 걸린 여동생을 데려오기 위하여 남편과 나는 서울로 향하였는데 날뛰는 망아지처럼 절대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며 찻길 속으로 뛰어드는 동생을 보고 나는 기겁을 하였다. 그것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여동생의 모습이 결코 아니었는데 난 처음으로 그 아이의 머리채를 잡고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동생들을 고향집에 데리고 갔지만 여동생은 다음 날 아침 첫차를 타고 서울을 향해 떠났다. 동생을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차로 네 시간이 넘는 거리를 두 번 더 데리러 갔는데 그때마다 그 아이는 몰래 집을 빠져나갔다. 세 번째는 할 수없이 함께 간 남편과 사촌오빠를 먼저 내려 보내고 나는 그렇게 서울에 혼자 남았다.


행거에 주렁주렁 매달린 옷들이 내 눈 바로 앞에서 일렁거리고 몸을 옆으로 돌릴 공간도 없는 비좁은 방은 퀴퀴한 냄새가 가득 배었다. 동생의 언니라는 이유로 방바닥 높이보다 약간 높은 그곳이 그나마 나은지 그 방 사람들은 그 자리를 내게 양보했는데 일주일만 교육받으면 언니가 원하는 대로 따를 것이라는 여동생의 말에 말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와 남편을 집에 두고 온 나는 동생을 데리고 나갈 일념으로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옆사람의 숨소리만 들어도 숨이 막히는 삼복더위에 학교 체육관만 한 공간엔 사람들로 빼곡하였다. 연설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은 집안과 재산 자랑을 하며 누구든지 시스템 안에서 열심히만 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고 그래서 자신처럼 좋은 집과 좋은 차 그리고 좋은 음식과 여행을 즐길 수 있다고 마이크에 대고 떠들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돌아보니 나이 어린 학생들이 대부분인데 그중에는 간혹 지긋한 나이의 사람들도 제법 끼어 있었다. 나는 몸을 벽에 기대어 쭈그리고 앉아 쥐가 날 것 같은 아픈 다리를 주무르며 땀을 뻘뻘 흘리며 참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러갔지만 내가 반대하면 그 일을 하지 않겠다는 동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속버스 터미널까지 나를 배웅하였다. 나는 터미널로 가는 전철 안에서 그 아이에게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어떻겠냐고 재차 물었지만 약속은 없었다는 듯이 여동생은 대꾸가 없었다. 그날은 비까지 내렸는데 버스 안에서 창을 때리는 바깥을 바라보며 뺨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렇게 일주일 만에 나는 집으로 돌아왔는데 남편은 빨강 물이 들었다고 생각하였는지 한동안 나를 아는 체하지 않았다.


여동생은 명절이 다가오면 부모님이 계신 시골로 가는 대신에 내게로 왔다. 명절을 지내고 서울로 갈 때면 다시 올라가지 않길 바랐지만 그 아이는 또 올게 라는 짧은 인사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말썽 한번 일으키지 않았고 사는 집이 학교와 멀어 일찍 집을 나서야 했던 동생은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공부만 하였는데 뒤늦은 사춘기를 하였는지 모든 것을 잃은 몇 년 후에야 내게로 돌아왔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발령을 기다리던 동생은 새로 연애를 시작하였고 오래지 않아 내게 남자 친구를 소개하였다. 나는 여동생이 조금 편안하고 여유로운 결혼생활을 하길 바라였기에 만나기로 한 날짜에 약속장소로 향하면서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는데 밤을 새워 조언을 하였지만 여동생은 자신만이 구원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여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말릴수록 불이 더 붙을 거란 생각으로 나는 제풀에 여동생이 지치길 기다렸지만

내 바람이 무색하게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첫아이를 낳자 아이를 키워주겠다고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응당 그래야 하는 듯 수고비 한 푼 없이 여동생은 아이를 맡기려고 하였고 전세금에 보태야 한다며 돈을 빌려달라고도 하였다. 동생집에 갈 때면 나는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함께 먹을 음식을 가지고 갔는데 자신만만하게 큰소리치며 한 결혼이라 그런지 큰 내색 않던 동생은 내 몸이 아프자 기다렸다는 듯이 왜 결혼을 말리지 않았느냐며 원망을 쏟았고 마치 내가 일부러 말리지 않은 것처럼 말하여 한 번 나를 아연하게 만들었다.


제부와의 첫 대면에서 나는 여동생을 대신하여 현재 무슨 일을 하며 월급이 얼마인지 물어보았다. 제부는 멀뚱 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였는데 같이 살면서도 배우자의 월급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어떤 직장을 가져보라고도 말을 못 하였다는 여동생을 대신하여 나는 아버지 기일에 만난 제부에게 부드러운 말로 "노니 뭐 한다고 욕심 내지 말고 부동산 공부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라고 제안을 하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여동생은 언니는 말을 어쩌면 그렇게 이쁘게 하느냐며 웃었는데 내 말을 들은 제부는 자격증을 취득하여 지금 영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내가 몸이 아프기 전 몇 년 동안 시골집에서 김장을 할 때 엄마가 양념을 해 놓으면 나는 여동생네가 먹을 것까지 함께 버무려서 통에 담아놓았다. 남동생이 더 이상 시골에서 김장을 하지 못하게 한 이후로 양념은 내가 하고 가져갈 것은 함께 버무리기를 바라였지만 전처럼 동생은 통에 김치를 담아놓아야만 차에 싣고 갔는데 동생이 이유 없이 집으로 찾아올 때도 아픈 몸을 몸을 일으켜 음식을 차렸지만 무슨 심통인지 자기를 밀어낸다며 하루는 억지를 부린 여동생이 승진을 거듭할수록 전화가 뜸하다.


ㅇㅇㅇ 이제 좀 편안해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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