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각종 책과 카페와 블로그와 칼럼과 강의까지 부동산 공부를 다들 이렇게 열심히 하면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동안 뭐하고 살았나' 종류의 허무함 뿐 만 아니라 결혼 후 전업주부로 살고 있는 친구가 서울에 집이 있었다는 이유로 내 피 같은 2억 3천을 뛰어넘는 시세차익을 이미 보았다는 팩트를 확인했을 땐 가슴이 쓰렸다. 그 친구에게 교사자격증이 아까우니 뭐라고 해보라고 충고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선량한 직장인이 되어 근 20년이 다 되는 시간 동안 보람과 자기 계발을 보탠다 쳐도 나는 바보로 살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보람과 자기 계발은 어디에도 없다. 보람이 있다면 이미 행복이 느껴졌어야 하고 자기 계발이 되었다면 이 직장을 그만두어도 다른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하지 않은가. 많은 직장인들이 이직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이유가 결국 원하는 회사에 필요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둘은 허상인 것이 분명하고 남는 것은 돈이다.
직장을 오래 다니면 돈이라도 남아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이 들면서 직장에 대한 회의가 생겼다. 이미 회의가 있던 차에 더 심한 회의감에 휩싸였다. 직장에서의 행복은 애초에 꿈꾸지도 않았지만 남들보다 쥐꼬리만큼의 경제적 여유는 더 누리고 사는 줄 알았다. 그러나 주변 몇 사람의 사례만 보더라도 나는 작은 미로 방에 갇혀 누군가 여기저기 숨겨놓은 보잘것없는 먹을 것에 만족하며 살고 있는 생쥐꼴이 된 것이 분명했다.
물론 비교를 하자면 끝이 없고 행복의 조건에 돈이 전부가 아님은 이론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말 그대로 이론일 뿐 나는 불행했다. 더 이상 이 미로 방에서 늙어갈 수는 없었다. 나는 이곳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 졌다.
부동산으로 돈을 번 사람들은 부지런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냥 어찌하다 보니 깔고 앉아있던 집값이 오른 경우도 많았다. 나는 후자는 별로 부럽지 않았는데 원래부터 내가 횡재운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으므로 기대도 없기 때문이다. 반면 전자의 경우는 질투심이 일 정도로 부러웠다. 운을 자기 능력으로 이겨버린 사람들 같아서 나는 열등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세상엔 잘난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
무협영화는 저리 가라였다. 그동안 어디에 숨어 살고 있었던 건지 치열하게 노력해서 이미 경제적 자유를 이룬 사람들이 꽤 많았다. 심지어 나보다 어린 사람들도 적지 않아서 나는 더 한심해졌는데, 일찌감치 월급의 중독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확고한 원칙을 세우고 실천한 이들은 위인전에 올라도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노력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은 그만큼 자기 관리가 철저했다.
열심히 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함을 의미했다.
특히 수십 채의 집에서 나오는 월세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간증을 보고 있으면 함께 환상의 나라로 빠진 것 같았다. 상상만 해도 달콤한 인생이지 않은가? 일을 하지 않는데 돈이 들어오고 있다니...
나는 더 늙기 전에 월급을 갖다 주는 또 다른 나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월세로 사치스러운 삶은 바라지 않았다. 출퇴근 시간을 포함해 하루에 꼬박 열 시간을 바치는 직장은 그동안 내 인생을 대가로 줬음에도 남겨 주는 것이 없었다. 여기서 하루빨리 탈출해야겠다고 상상만 했던 것을 나는 꼭 현실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이미 내 월급은 그리 많지 않았고 나는 크게 욕심을 부릴 일도 없으니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