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제가 사회문제를 담지 못하는 구조에 대하여
도시마다 계절마다 수많은 축제가 열린다.
봄엔 꽃, 여름엔 바다, 가을엔 책과 맥주, 겨울엔 빛과 트리.
축제의 테마는 다양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비슷하고, ‘즐겁고 가볍고 밝은’ 콘텐츠로 채워진다.
체험 부스, 포토존, 푸드트럭, 드론쇼와 같은 익숙한 풍경들.
기획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 반복은 어느 순간 질문이 된다.
우리는 축제를 흔히 ‘즐기는 행사’로 생각하지만,
축제는 원래 공동체가 자신을 확인하고, 시대의 감정을 공유하며, 갈등과 상처를 다뤄내는 사회적 장치였다.
고대의 제의에서 축제는 신과 인간, 자연과 사회의 질서를 재조정하는 의례였고,
중세 유럽의 카니발(Carnival)은 위계와 질서를 전복하는 ‘일시적 해방의 공간’이었다.
러시아 문학자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은 카니발을 “사회적 위계를 뒤집고 억눌린 감정을 해방시키는 공간”, 즉 제도 바깥에서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 해석했다.
현대에 들어서도 축제는 단순한 놀이를 넘어, 정치적·사회적 메시지를 담는 발화의 공간으로 진화해왔다.
1969년 미국의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베트남 전쟁 반대와 반문화 운동의 상징적 무대였다.
독일 베를린의 "48 Stunden Neukölln Festival"은 매년 난민, 젠트리피케이션, 사회적 고립같은 도시 문제를 중심 주제로 내걸며, 2022년엔 ‘Eccentric Times’를 통해 디지털 소외와 정신건강의 문제를 제기했다.
프랑스 리옹의 "Les Nuits de Fourvière"는 2023년 “이행기의 세계” 주제로 노동, 이주, 기후위기 등 불편한 주제를 야외극장에서 진중하게 다뤘다.
한국에서도 축제가 시대의 분노와 슬픔을 담았던 순간이 있었다.
2016~17년의 광화문 촛불집회 문화제는 수백만 시민이 광장을 채우며 단순한 정치 집회가 아닌,
노동자·청년·이주민·장애인이 무대 위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말하는 축제, 공동의 감정이 진동하는 공공예술의 장이 되었다.
축제는 본래 시대의 감정과 균열을 직면하고 발화하는 사회적 언어였다.
그런 점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축제”는, 어쩌면 자신이 누구였는지 잊어버린 축제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지금, 그 말을 하지 못하는 걸까?
이 글은 그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한국의 대부분의 축제는 공공예산으로 운영된다.
기획 공모나 위탁 운영에서도 ‘정치적 중립성’이 주요 심사 항목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문제라는 건 본질적으로 입장이 갈릴 수밖에 없는 주제라는 점이다.
기후위기, 젠더폭력, 청년빈곤, 지역 소멸…
이 모든 이슈는 시민의 일상과 깊이 연결돼 있지만, 공공기획에서는 ‘민감한 사안’으로 분류되어 피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서울퀴어문화축제다.
2025년 현재까지도 서울시는 서울광장 사용을 허가하지 않고 있으며, 여론조사에 따르면 도심 개최를 반대하는 응답자가 절반을 넘는다.
심지어는 “세금으로 편향된 행사를 한다”는 비판까지 뒤따른다.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언급하지 않는다’는 기획자 내부의 검열 구조는, 결국 ‘말을 하지 않는 축제’를 낳는다.
“사람이 얼마나 왔나요?”
기획이 끝나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다.
축제의 성공을 따지는 기준은 늘 ‘경제적 파급력’, ‘관광객 수’, ‘SNS 확산’이다.
문제는 이런 구조 속에서 사회문제를 담는 시도가 불필요한 위험 요소로 취급된다는 것이다.
기업 협찬은 당연히 중립적이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선호한다.
“기후위기와 예술을 결합한 전시입니다”라는 기획보다 “감성 포토존이 많아요!”라는 메시지가 더 안전하다.
한국 사회에서 축제는 점점 더 소비 가능한 콘텐츠 묶음이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보다 “얼마나 눈에 띄는가”가 먼저 묻힌다.
젠더나 노동, 인권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쉽게 갈등 프레임으로 소모된다.
서울퀴어문화축제뿐 아니라, 대전, 광주 등지에서도 퀴어퍼레이드는 ‘맞불 집회’와 ‘시민 불편’을 이유로 지자체가 장소를 불허하거나, 축소 운영을 종용한다.
이런 반응은 단순한 행정 편의 문제가 아니다.
공공이라는 단어가 여전히 ‘무색무취’를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회피가 사회 갈등을 해결하지도, 치유하지도 못한다는 데 있다.
오히려 축제라는 공동체적 공간이 갈등을 담아내지 못할 때, 그 사회는 말할 수 있는 장소를 잃는다.
“괜히 문제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 싫어요.” 현장에서 들었던 한 프리랜서 기획자의 말이다.
그는 젠더를 주제로 한 프로그램을 제안했다가 담당자에게 “그런 건 괜히 구설수 나요”라는 피드백을 받았다고 했다.
안전한 콘텐츠, 무난한 테마, 불편하지 않은 체험이 축제 기획의 전제가 된 것이다.
또한 많은 지역축제에서는 행정 편의와 관행에 익숙한 총괄형 기획자가 많고, 사회 담론을 스토리텔링할 수 있는 내러티브형 기획자는 드물다.
기획자들이 ‘행정의 일부’로만 기능할 때, 축제는 목소리를 잃는다.
우리는 왜 기후위기를 이야기할 수 없고, 청년의 고립을 말하지 못하며, 이주노동자의 노래를 축제 무대에 올리지 못하는가?
이 질문은 ‘정치적 기획’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문화의 책임’을 묻는 질문이다.
축제는 사회의 거울이어야 한다.
기획자는 그 거울에 어떤 풍경을 비출지 결정하는 사람이다.
이제, 무엇을 비추지 않을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비추기로 선택할 것인가를 말해야 할 때다.
물론, 사회문제를 다룬다고 해서 반드시 축제가 무겁고 투쟁적일 필요는 없다.
축제는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몸', '놀이', '리듬'이기도 하다.
때론 웃음과 유쾌함 속에서 더 날카로운 메시지가 전달되기도 한다.
예컨대 ‘멍 때리기 대회’는 언뜻 보기에 엉뚱한 놀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피로사회 속에서 바쁜 현대인의 번아웃 회복과 정지의 권리를 축제형 퍼포먼스로 풀어냈다고 볼 수 있다. CNN은 '한국의 경쟁사회에서 벗어나 일종의 예술작품'이라고 평가했고, 2025년에는 경쟁률이 57:1에 달했다.
또 축제 행사장에서 다회용기 사용은 운영의 윤리성을 축제 콘텐츠로 연결하는 작은 정치이자, 기후위기 속에서 실천과 메시지를 녹여내는 방식이다.
만약 시니어 세대가 키오스크 앞에서 겪는 불편과 디지털 소외를 유머와 참여로 풀어내는 ‘키오스크 주문 경진대회’가 열린다면 어떨까?
서브웨이의 수많은 선택 옵션들을 정확하게 눌러 누가 더 빠르게 샌드위치를 받을 수 있을지 대회를 열어보자. 시니어라고 샌드위치 좋아하지 말란 법 없지않나?
혹은 취업, 비정규 고용 등으로 지친 청년들이 부담없이 웃고, 울고, 쉴 수 있는 심리방역 축제 ‘마음 치유 위크 – 취준생 전용’는 어떨까?
이 모든 아이디어는 결국 질문 하나에서 시작된다.
“이 문제를 축제로 풀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질문에 ‘예’라고 답하는 사람이 바로 기획자다.
이번 장바구니에는 ‘불편한 질문’과 함께
‘소소한 상상’ 몇 가지를 함께 담는다.
참고자료
Bakhtin, Rabelais and His World, 1965
Time Magazine (2019). “Woodstock at 50: How the Festival Changed America Forever.”
48 Stunden Neukölln Festival (2022). Festival Program Guide.
Les Nuits de Fourvière (2023). Annual Report.
경향신문 (2017.03.13.) "‘134일간 1600만여명’···촛불 집회, 스무번의 순간들"
CNN·뉴시스 (2024). “이건 예술작품이다…외신도 놀란 ‘멍때리기’ 대회.”
내 손안에 서울 (2025). “역대 최고 경쟁률 57:1…2025 한강 멍때리기 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