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꺼진 불빛이 예술이 되는 밤-서울의 엑스트라쉬히트

산업의 밤을 문화의 근무로 바꾼 특별한 야간근무(ExtraSchicht)

by 아이린

밤을 밝히는 산업의 기억, 독일의 엑스트라쉬히트(ExtraSchicht)


독일 루르 지역의 여름 밤은 유난히 깊다.
매년 6월 마지막 토요일 밤, 광산과 제철소, 화력발전소와 폐철도차량기지가 동시에 불을 밝힌다.
산업의 흔적이 가득한 이 거대한 공간들은 그 단 하루, 모두 하나의 공연장으로 깨어난다.
이 축제가 바로 엑스트라쉬히트(ExtraSchicht).

2001년 시작해 올해(2025)로 24회를 맞은 이 야간축제는 루르 광역권 18개 도시가 함께 만드는 산업문화의 밤이다.
셔틀버스와 철도를 타고 이동하며 사람들은 광산 속 콘서트, 제철소 벽면 미디어아트, 폐차량기지 퍼포먼스를 오가는 특별한 시간을 경험한다.

올해 중심 무대는 세계문화유산 졸페라인(Zeche Zollverein).
“Träume?! (꿈을?!)”이라는 주제 아래 드론과 영상, 공장 기둥과 굴뚝에 비친 미디어 설치가 이어졌고, 산업의 유산이 예술로 번역되는 순간은 도시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서사로 만들었다.

루르의 이 밤은 오래된 공장을 예쁘게 꾸미는 이벤트가 아니다.
사라진 산업의 시간을 문화의 언어로 다시 호출하는 방식이며, 주민들이 “이것이 우리의 이야기였지”를 다시 떠올리는 기억의 복원이다.


산업의 밤이 문화의 근무가 되는 이름, ExtraSchicht

‘Schicht’는 독일어로 교대근무, 특히 밤 근무를 말한다.
‘Extra’는 특별한, 추가의.
즉 ExtraSchicht는 “한밤의 특별근무”, 과거 노동의 밤을 문화의 밤으로 다시 켜는 의식이기도 하다.


엑스트라쉬히트를 보며 자연스럽게 서울을 떠올렸다

빠른 개발 속에 서울은 산업의 흔적을 많이 지웠다.
그러나 지워진 건 건축물이 아니라 기억일 뿐, 도시 곳곳에는 여전히 ‘밤을 밝혔던 산업의 잔향’이 남아 있다.

서울 역시 한때 노동이 흐르고, 밤새 진동과 빛으로 움직이던 도시였다는 사실.
그 기억을 문화로 번역해 다시 켜는 방식, 이것이 내가 루르의 축제를 서울에 대입해보고 싶었던 이유다.

서울의 산업유산을 보존의 언어가 아니라 ‘문화적 재가동’의 언어로 엮어내는 일.
도시가 가진 과거의 결을 미래의 문화 자원으로 만드는 전략이기도 하다.

2025년 엑스트라쉬히트 포스터(출처: TOURISMUS RUHR), 2024년 엑스트라쉬히트 전경(출처: essen.t-online)
2023년 행사 전경(출처: TOURISMUS RUHR), 엑스트라쉬히트를 묘사한 그림책 일러스트(출처: https://wimmelbuch.ruhr/)

엑스트라쉬히트 2025 행사장 전경 : 링크

엑스트라쉬히트 2025 보훔 박물관 전경 : 링크

엑스트라쉬히트 2023 애프터무비 : 링크



엑스트라쉬히트 in 서울 — 여섯 개의 기억을 잇다


루르의 밤을 보며 서울이 떠오른 건, 이 도시에도 한때 산업이 흐르고, 노동이 숨 쉬고, 밤새 불빛을 밝히던 장소들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조용히 흔적만 남은 채 숨만 쉬고 있지만, 조금만 손을 대면 다시 켜질 수 있는 기억들.

그래서 상상했다.서울의 산업유산들이 단 하루, 다시 불을 켜는 밤을.

한강을 따라 이어진 오래된 구조물과 흔적들이 서로 신호를 주고받듯 빛과 소리로 연결되는 순간을.

도시의 기억이 흐르는 순서, 그리고 사람들이 실제로 이동하기 쉬운 동선, 이 두 가지를 함께 고려해 서울의 ‘엑스트라쉬히트 in 서울’을 그려보았다.

1975년 서울역 전경(출처: 서울기록원), 1958년 영등포 공장 전경(출처: 서울기록원)
1963년 연탄공장(출처: 서울기록원), 1979년 선유 수원지 전경(출처: 서울기록원)
1968년 당인리발전소 터빈 수송(출처: 서울기록원), 1985년 목동 열병합발전소(출처: 서울기록원)


엑스트라쉬히트 in 서울의 시작은 서울역이다.

도시의 역사는 늘 이동의 순간 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었으니까.


1) 문화역서울284 - 서울의 시작과 끝이 모이는 곳

서울역은 수도 서울의 관문이다.

수많은 노동자와 이주민, 장사꾼과 여행객이 오고 가고, 산업 발전을 위한 수 많은 물자가 이 곳을 거쳐갔다.
서울역은 서울 도심 중 이동의 시간과 기억이 가장 농축된 공간이다.

밤이 되면 그 기억이 다시 느리게 맥박을 친다.

증기기관의 숨소리, 플랫폼의 울림, 기차의 리듬이 사운드와 영상으로 울려 펴지는 순간, 도시의 ‘출발점’이 자연스럽게 열린다.

경성역으로 불리던 시절의 서울역(위키피디아), 현재 문화역284로 운영되는 구 역사(나무위키), 현재의 서울역(위키피디아)


2) 경의선숲길 - 도시의 레일이 천천히 쉬어가는 자리

한때 도시는 레일을 따라 확장됐고, 그 레일은 지금 사람들의 산책길이 되었다.

이곳은 도시의 과거와 현재가 가장 조용하게 공존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이 구간은 ‘걷는 속도로 재생되는 미디어 산책길’ 이 된다.
나무 사이 작은 프로젝션, 이 길을 걷는 현대인들의 발걸음에 반응하는 조명.
경의선 레일이 실은 수많은 시간들이 서서히 복원되는 밤이 된다.

그리고 이 길을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한강의 기운이 느껴진다.
도시는 물 가까이 갈수록 더 오래된 기억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경의선 숲길 공원 전경 (서울시)


3) 마포 문화비축기지 - 저장되었던 에너지가 울림이 되는 곳

경의선에서 서쪽으로 조금만 발걸음을 더 옮기면 거대한 원형의 탱크들이 조용히 서 있는 옛 마포 석유비축기지(현 문화비축기지)가 나타난다.

이곳은 서울의 에너지를 실제로 저장하던 장소였다.
도시를 움직이는 힘이 이곳에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밤이 되면 이 탱크들은 내부의 공간 울림을 그대로 살린 사운드 퍼포먼스 무대가 된다.
금속과 콘크리트 벽에 부딪힌 소리는 그 자체로 한 편의 공연이다.

야외에서는 에너지·기후를 주제로 한 부드러운 조명 설치와 환경 퍼포먼스가 이어지고,
천천히 숨 쉬는 도시의 에너지를 장면으로 만들어낸다.

이곳을 지나면, 다시 물가로 내려가는 길로 이어진다.

석유탱크가 그대로 남아있는 현재 문화비축기지, 문화비축기지 탱크 내부 전경(국가건축정책위원회)


4) 선유도 - 폐정수장 위에 피어난 생태의 흔적

산업의 흔적 위로 자연이 들어와 자리를 잡은 독특한 도시 생태, 선유도는 서울이 스스로 치유한 공간이다.

빛과 바람이 정수장 벽면에 스미고, 낮은 조명이 식물의 그림자를 흔드는 장면은, 도시가 가진 '회복의 리듬'을 가장 잘 보여준다.

여기서는 수면 위로 떠오르는 얇은 워터 스크린, 습도·바람 센서에 반응하는 조명 설치, 폐구조물 사이로 흐르는 잔잔한 사운드가 어울린다.

산업의 단단함과 자연의 부드러움이 동시에 비치는 공간.

선유도 공원 전경(영등포구, 서울시)


5) 문래동 철공소 거리 - 쇠의 리듬이 살아 있는 곳

선유도의 부드러운 바람을 뒤로 하고 문래동에 들어서면 도시의 온도가 달라진다.
이곳에는 아직 '일하는 소리'가 남아있다.
용접소리, 금속의 진동, 기계의 떨림.

그래서 문래는 서울의 밤에서 가장 생생한 무대가 된다.
금속 타악, 철공 퍼포먼스, 장인과 예술가가 협업한 쇼케이스.
이 모든 것이 문래의 일상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그 자체를 예술로 보여주는 밤이 된다.

그리고 서울의 산업의 밤은,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며 완성된다.

철공소가 즐비한 문래동 전경(위키피디아)


6) 당인리 화력발전소(서울화력발전소) — 서울의 심장을 다시 켜는 곳

이 모든 흐름의 끝에는 당인리 화력발전소가 있다.
서울의 전력을 만들어내던 실제 '심장' 같은 공간.
지금은 문화창작발전소로 변신 중 이지만, 여전히 공간에는 에너지의 잔향이 남아 있다.

터빈홀이 밤에 다시 켜지면 빛과 소리가 거대한 파형처럼 공간을 메운다.
전력의 흐름이 시각화되고, 도시는 마치 다시 심장박동을 되찾는 것처럼 느껴진다.

서울판 엑스트라쉬히트의 마지막 장면은 그렇게 도시의 심장을 다시 켜며 끝난다.

옛 서울화력발전소 전경, 현재 문화체육관광부가 조성 중인 '당인리 문화창작발전소' 조감도 (위키피디아, 연합뉴스)


서울역에서 출발해, 경의선의 느린 레일을 따라, 한강의 바람을 건너 선유도를 지나고, 문래의 뜨거운 쇠소리를 거쳐, 당인리의 심장으로 도착하는 흐름.

이 루트는 도시의 시간·기억·감각이 흘러가는 순서로 짜여 있다.

그리고 그 흐름을 지하철, 따릉이, 순환버스, 도보로 쫓아간다.
서울이 가진 이동의 인프라 전체가 한밤의 공연장을 이어주는 회로가 되는 것이다.

도시가 가진 리듬과 방향성 자체를 하나의 구조로 만드는 방식.
그게 엑스트라쉬히트 in 서울의 모습이다.



독일과 서울, 서로의 밤을 건네는 방식 - 두 도시의 밤이 서로 닿을 수 있을까?


독일 루르와 한국 서울은 9시간의 시차가 있다.
현실적으로 서로의 축제를 같은 밤에 열어 관객을 교차 이동시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방식이 있다.
서울과 루르가 서로의 밤을 '건네주는' 방식으로 연결되는 것.

루르의 엑스트라쉬히트가 끝나면 그 밤의 일부 장면을 서울의 공간에서 다시 상영하며 서울의 엑스트라쉬히트가 시작된다.
서울의 엑스트라쉬히트가 끝나면 서울의 소리와 빛을 루르의 광산과 제철소에서 송출하는 식이다.

두 도시는 다른 시간대에 있지만, 서로의 도시가 가진 밤의 리듬을 천천히 넘겨주는 교류.
일종의 거대 도시 아카이브 교환 프로그램 같은 형태다.

또 서울의 예술가가 루르의 폐광에서 작업을 하고, 루르의 예술가가 문화비축기지나 당인리에서 작품을 선보인다면, 두 도시의 산업유산이 서로의 시선으로 다시 정의될 것이다.


축제주간 동안, 서울의 밤을 담은 영상이 루르의 공장 벽면에 투사되고,
루르의 밤을 기록한 사운드가 서울의 정수장, 숲길, 철공소에서 다시 울린다면
두 도시는 비록 동시에 빛나지 않더라도 서로의 시간을 '이어붙이는' 초국가적 축제를 만들 수 있다.

초국가적이라는 말이 꼭 물리적 이동을 뜻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서로의 시간을 교환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강한 연결이 만들어진다.

엑스트라쉬히트 페스티벌 전경(출처 별도 표기)


결국 이 모든 것은, 도시가 스스로의 기억을 다시 켜는 방식을 보여준다.

꺼졌던 발전소의 심장, 정수장의 물빛, 레일의 조용한 시간, 쇠를 두드리던 진동.
서울에는 아직 말하지 않은 산업의 문장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 문장들을 한밤중에 조용히 열어보는 축제.
도시의 과거와 미래가 한순간 겹쳐지는 경험.

나는 그 밤이 서울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루르의 밤과 서울의 밤이 서로의 시간 위에 조용히 포개지는 순간을 기대해본다.


엑스트라쉬히트 in 서울.

도시의 기억을 다시 켜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엑스트라쉬히트 페스티벌 사진 출처

https://www.cultural-service.de/tourismus/extraschicht

https://www.ruhrbarone.de/extraschicht-2023-das-programm-der-langen-nacht-der-industriekultur/220054/

https://genussbummler.de/extraschicht-eine-nacht-der-industriekultur/

https://leserservice.rp-online.de/checkout/1801508?p_session=S08bQZBBS37uuEPjNicQaCd5USUXNP7B&advM=WT101&osc_source=paywall&osc_campaign=freemium-tagespass-no_scorer-b-pmntmthd-a_b_testing_ki_audio_player_text_c&pwsource=https%3A%2F%2Frp-online.de%2Fnrw%2Fstaedte%2Fmoers%2Fextraschicht-in-moers-was-das-programm-bietet_aid-112268447&LTs=no_score&LTreturn=no_score&CScore=no_score

https://www.bochum-tourismus.de/bochum-entdecken/festivals-und-events/extraschicht.html#c40072

https://de.wikipedia.org/wiki/ExtraSchic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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